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8월부터 멕시코에 30%에 달하는 ‘상호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예고하면서, 한국 가전업계의 불안감도 커지고 있다. 북미 수출용 가전제품 상당수가 멕시코에서 생산되고 있어, 관세가 현실화되면 가격 경쟁력에 직접적인 타격이 불가피해서다.
멕시코는 그간 삼성전자와 LG전자의 북미 가전 수출을 위한 핵심 생산기지였다. 삼성전자는 케레타로와 티후아나 공장에서 각각 냉장고와 TV를, LG전자는 몬테레이와 레이노사에서 냉장고와 TV를 생산하며 미국 시장에 제품을 공급해왔다. 구체적인 생산량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LG전자의 TV를 예로 들면 지난해 북미향 TV 출하량 약 500만대(시장조사기관 옴디아) 중 300만대(60%)가 멕시코 레이노사 공장에서 생산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LG전자는 지난 4월 트럼프 행정부가 베트남에 46%에 달하는 고율 관세 부과를 예고하자 바로 다음 달인 5월 베트남 하이퐁 공장의 냉장고 생산라인 가동률을 절반으로 줄인 것으로 알려졌다. 대신 멕시코 몬테레이 공장의 냉장고 생산량을 늘려 미국 공급 비중을 확대했다. 현재 미국 정부는 멕시코에 ‘미국·멕시코·캐나다협정(USMCA)’ 적용 이외 상품에 대해서만 25% 관세를 부과하고 있는데, 올해 1분기 기준으로 가전제품을 포함해 미국 수출용 멕시코 상품의 87%가 무관세를 적용받고 있다.
그러나 돌연 트럼프 대통령이 멕시코에 상호관세 30%를 예고하면서 비상이 걸렸다. 삼성·LG 모두 미국에도 생산기지가 있지만 당장 거점 공장으로 전환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미국엔 세탁기 생산 라인만 있는데 여기서 냉장고나 TV까지 생산하려면 생산설비를 추가로 마련해야 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높은 인건비도 큰 장벽이다. 조주완 LG전자 최고경영자(CEO)는 지난 4월 서울대 특별강연에서 취재진을 만나 “미국 공장 증설은 가장 마지막 수단”이라며 “생산지 변경이나 가격 인상 등 순차적인 시나리오에 따라 해야 할 것 같다”고 설명했다.
게다가 멕시코 대체 생산지로 떠올랐던 브라질마저 미국의 고관세 가능성에 매력도가 떨어지고 있다. LG전자는 브라질 마나우스에서 TV와 에어컨을 생산하고 있으며, 지난해부터는 약 4000억원을 투입해 파라나에 신공장을 건설 중이다. 삼성전자도 브라질에서 스마트폰과 TV 등을 생산 중이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9일(현지시간) 브라질에 기존 10%에서 50%로 상호관세율을 인상하겠다고 서한을 보내면서 브라질을 미국 수출 기지로 활용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주목받는 곳이 베트남이다. 최근 미국은 베트남과 협상 이후 베트남산 제품에 상호관세 20%를 부과하기로 했다. 베트남이 미국에 무역 시장을 완전 개방하기로 하면서 상호관세율이 기존 46%에서 대폭 낮아진 것이다. 베트남에 주요 가전제품 생산라인을 보유한 국내 기업들로선 일단 숨통이 트인 셈이다. LG전자 관계자는 “이전에 물량을 조절했던 기존 베트남 생산라인 가동률을 다시 올리면 된다”라고 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의 각국 관세 부과 예고가 추후 협상에서 ‘판 흔들기용’ 전략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멕시코와의 무역 관계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한 강경 압박 수단”이라고 평가했다. 멕시코 내 한국 가전 기업 관계자는 “30%의 상호관세를 부과하겠다고 했지만 지금처럼 USMCA 적용 품목을 유지한다면 관세에서 제외될 가능성이 있다”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