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정부에 F4(Finance 4) 회의라는 게 있었다. 경제부총리, 한국은행 총재, 금융위원장, 금융감독원장 등 네 명이 멤버다. 재정·통화 당국에다 막강한 시장 장악력을 가진 감독기관까지 가세했으니 사실상의 ‘경제 컨트롤타워’나 마찬가지였다. 지난해 12월 3일 계엄사태 직후에도 이 회의가 열렸다. 참석자 면면을 보면 박정희 시대 ‘녹실회의’, 이후의 ‘서별관회의’와 유사하다. 대통령실이 빠지고 회의가 정례화했다는 게 차이다. 그러다 보니 참석자들은 보다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한국 경제의 주요 쟁점을 놓고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상법 개정, 증시랠리 동력 됐지만
‘더 센 상법’ 속도전 부작용 우려도
혁신과 성장에 투자할 유인 필요
상법 개정도 그중 하나였다. 기업 이사가 충실해야 하는 대상을 기존의 ‘회사’에서 ‘주주’로 확대하는 것이 개정안의 골자였다. 당시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이 소액주주의 요구를 받아 이를 추진했고, 재계는 소송 남발과 경영권 위협을 들어 강력히 반대하고 나섰다.
당시 F4 회의에서 벌어진 토론의 분위기는 어땠을까. 한 고위 인사의 전언은 예상 밖이다. 찬반이 팽팽했다는 것이다. 반대 논지를 펼친 인사들도 취지에는 적극적으로 공감하지만 기업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는 상법 대신 자본시장법을 개정해 문제가 되는 특정 행위를 규제하자는 쪽이었다. 만연한 쪼개기 상장, 석연찮은 유상증자, ‘쥐꼬리 배당’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정책 결정자들 사이에서도 상당히 넓게 공유됐던 셈이다. 상법 개정은 한덕수 대통령 대행의 거부권 행사로 한차례 무산됐지만, 새 정부 출범 직후 다시 국회를 통과했다. 이번에는 야당이 된 국민의힘마저 찬성으로 선회했다. 이런 여론 지형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건 재계로선 뼈아픈 패착이다.
상법 개정 이후 증시는 일단 상승일로다.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에만 코스피 지수가 18% 상승했다. 이 대통령이 공언한 ‘코스피 5000’시대가 현실화하는 것 아니냐는 낙관론도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여권에선 환호성이 터져 나온다. 관세 전쟁에 내수 부진, 서울 아파트값 급등 등 잇따르는 악재 속에서 증시의 선전은 단연 눈에 띄는 호재다. 고무된 여당에선 이른바 ‘더 센 상법’이 줄줄이 발의되고 있다. 여기엔 1차 개정 때 빠진 집중투표제 도입, 감사위원 분리 선출 확대와 함께 자사주 소각 의무화도 담겼다. 내친김에 코스피 5000을 현실화시켜 내년 지방선거에서 “경제를 살렸다”는 소리를 반드시 듣겠다는 태세다.
하지만 과도한 흥분과 조바심은 늘 일을 그르치게 만드는 법이다. 소액주주의 권익이 제대로 보호받지 못한 게 한국 증시의 한 단면이라면, 경영권 보호장치가 부족하고 주주환원을 막는 각종 세제가 존재하는 것 역시 또 다른 단면이다. 이런 상황에서 지배구조를 무작정 흔들기만 할 경우 기업들은 수비적이 될 수밖에 없다. 투자보다는 경영권 방어에 매달리고, 주가 상승의 열매도 외부 투기자본이 쓸어갈 염려가 있다. 2차, 3차 상법 개정 속도전 속에서 이를 보완할 대책은 제대로 논의되고 있지 않으니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는 건 당연하다.
무엇보다 국회의 법 개정만으로 주가를 무한정 끌어올릴 순 없는 노릇이다. 이번 상승 랠리의 대표적 수혜주는 금융주다. 새 정부의 정책 기조에 맞춰 배당을 더 늘리고, 자사주 소각에 나설 것이란 기대감에서다. 하지만 한 금융지주사의 회장은 “주가가 너무 급하게 오르는 것 같아 사실 좀 부담스럽다”고 했다. 그는 “그간 상승은 제값을 못 받고 저평가됐던 부분이 해소되는 과정인데, 그것만으론 한계가 뚜렷하다”면서 “증시가 지속적으로 상승하려면 단순한 저평가 해소를 넘어 성장과 혁신을 이끄는 분야로 돈이 본격적으로 흘러야 한다”고 지적했다.
코스피 5000이 현실화할 경우 800여개 상장사 시가총액은 4000조원가량이 된다. 현재보다 50% 이상 늘어야 하는 수준이다. 꿈의 숫자 같아 보이지만, 미국의 빅 테크를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AI 선두주자 엔비디아 한 곳의 시총만 5500조원이 넘는다.
주가는 정책과 유동성의 영향을 받지만 결국 ‘기업 이익의 함수’다. 또 같은 이익을 내더라도 ‘성장의 기대’가 있다면 제값보다 몇 배씩 더 쳐준다. 문제는 상법 개정에 열광하는 한국 증시에선 그런 류의 기대감은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 경제의 잠재 성장률은 1%에도 못 미치고, 주력산업들은 줄줄이 성장 정체 상태다. 증시가 겨우 지독한 저평가 상태를 벗어난다고 도취감에 휩싸여 있을 때가 아니다. 성장과 혁신의 기풍을 되살리고, 돈의 물길을 부동산에서 증시로 돌릴 새 정부의 청사진이 서둘러 마련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