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시 임하면 내앞마을 앞 반변천 가에 경상북도 독립운동기념관이 있다. 이곳은 의성 김씨 집성촌인데 기념관이 여기에 있는 건 이 마을서 25명이나 되는 독립유공자가 나와서다. 안동은 독립운동가를 가장 많이 배출한 곳으로 유명한데 반변천을 따라서 가다 보면 낙동강과 만나는 지점에서 상해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李相龍·1858~1932)의 종택인 임청각(臨淸閣)을 만난다. 임청각은 일제가 중앙선을 놓으면서 갈라놔 그동안 보기가 흉했는데 복원이 거의 끝나가 이제 제 모습을 곧 드러낼 예정이다. 임청각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99칸 집이라서 건축학적으로도 의미가 크다.
독립 소신 후배 유림들에게 영향
석주 조상들은 임청각에서 500년 이상 살아왔는데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자 50여 명의 일가를 이끌고 만주로 이주해 이 유서 깊은 곳을 떠나야 했다. 그는 집안 노비들을 모두 풀어준 뒤 압록강이 얼기를 기다려서 그해 겨울 망명길에 올랐는데 나라를 잃은 마당에 ‘공자왈 맹자왈’이 무슨 소용 있느냐는 소신에서 비롯된 행동이다. 이런 소신은 후배 유림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쳐 이들을 가리켜서 혁신 유림이라 부른다. 내앞마을 사람인 처남 김대락(金大洛)도 혁신 유림으로 석주와 함께 만주로 떠났다.
노비 해방 후 일가 이끌고 만주로
일제가 철도 놔 갈라진 집 곧 복원
무장 투쟁 신념 신흥강습소 설립
안창호의 실력양성 노선과 달라
심복 둘 잃자 76세에 곡기 끊어
유언 따라 1990년에 유골 돌아와
“칼끝보다 날카로운 겨울 찬바람이 내 살을 사정없이 도려낸다./ 살이야 도려내도 참을 수 있지만, 애간장이 끊어지니 어찌 슬프지 않으리./ 차라리 내 머리가 잘릴지언정 무릎 꿇고서 종은 되지 않으리./ 집을 나선 지 어언 한 달 가까운데 어느새 압록강을 건넜다./ 누구를 위해 이 발길을 머뭇거리랴. 가슴을 펴고 가리라. 나는 가리라.”
석주가 압록강을 건널 때 지은 시인데 그와 뜻을 같이해서 비슷한 시기 압록강을 건넌 이회영 형제의 심정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이들이 정착한 곳은 만주 서간도로 지금의 길림성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다. 석주가 여기를 정착지로 삼은 건 중국 땅이라도 조선과 가까워서 공격하기에 좋아 일제와의 무력투쟁을 효과적으로 벌이기 위해서다.
석주는 이곳에 정착한 뒤 토착민과의 이질감을 없애기 위해 앞장서서 상투를 자르고 옷차림도 청나라식으로 바꿨다. 이름도 중국인에게 거부감을 주는 상희(象羲)에서 상룡으로 고쳤다. 그리고 1911년 4월 삼원보 대고산(大孤山)에서 노천 군중대회를 열고 경학사(耕學社)를 설립했다. 경학사는 국내 독립운동에 한계를 느낀 안동 혁신 유림과 이회영 형제가 주동이 돼서 가산을 모두 처분해 만든 조직으로 해외에 최초로 설립된 한인 자치기구다. 이 단체의 책임자로 석주가 추대되었고, 그가 경학사 취지문을 낭독할 때 동포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경학사 산하에는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인 신흥강습소도 있었다. 신흥강습소는 비록 옥수수 창고에서 시작했어도 무장 항일투쟁을 위한 인재를 본격적으로 양성할 수 있었다. 의열단장 김원봉도 이 강습소에서 여러 동지를 규합해 의열단을 결성한 바 있다. 석주도 3·1운동이 있기 1년 전인 1918년 김좌진·김동삼과 함께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일제에 독립전쟁을 선포했다. 그리고 3·1운동의 영향으로 신흥강습소를 찾아오는 청년들이 늘면서 본교를 하동(河東)의 대두자((大肚子)로 옮기고 교명을 신흥무관학교로 바꿨다.
또 조선을 떠난 한인들이 서간도로 많이 모여들자 경학사는 부민회(扶民會)로 이름을 바꿨다. 석주는 부민회 설립과 관련해 ‘만주기사’에서 ‘정부 규모는 자치를 명분으로 삼고 삼권분립은 문명국을 따른다’라는 혁명적인 생각을 밝혔다. 그리고 공화정을 목표로 했는데 이는 조선이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는 전혀 다른 길이었다. 그러니 석주가 꿈꾼 나라는 왕과 사대부가 지배하는 나라가 아니라 모든 백성이 평등하고 자유가 보장되면서 상부상조하는 나라였기에 그는 ‘조선의 쑨원(孫文)’에 비견할만하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국체가 민주공화국인데 이것이 석주로부터 비롯됐다는 점에서 뜻깊다.
1920년에 들어서자 부민회는 한족회(韓族會)로 확대되었는데 이때 군정부를 산하에 두었다. 군정부를 산하에 둔 건 서간도 각지에서 흩어져서 이루어지던 항일 무장투쟁을 하나로 통합하기 위해서다. 이때 석주는 한족회 회장에 취임함과 동시에 항일무장투쟁 운동의 선두에 섰다. 이에 따라 서로군정서를 설립해 독판에 취임한 뒤 지청천 장군을 북간도로 보내 북로군정서의 김좌진 장군과 연합해 청산리 대첩에서 승리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했다. 이 기구가 후에 광복군의 전신이 된다.
그런데 신흥무관학교 설립과 관련해서 잘못 알려진 사실이 있다. 이회영 형제가 세운 거로 알려져 있는데 이 학교를 세우고 운영하는 데 석주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석주가 학교를 세우고 교장으로서 운영을 책임진 데다 그의 처가인 내앞마을 사람 김동삼이 군사교관 책임자였고, 맏아들 이준형의 외사촌인 내앞마을 사람 김형식이 일반행정 책임자였다. 그러니 신흥무관학교는 안동 혁신 유림에 의해 주도적으로 설립되고 운영되었다. 물론 이회영 형제는 금전적으로 크게 보탰지만, 마적단에게 돈을 뺏겨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설도 있다.
초대 국무령 맡았다가 사임
한편 석주가 만주에서 벌인 항일운동은 상해임시정부의 노선과 차이가 있다. 석주는 외교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수단이지 그 자체가 목표가 될 수 없어 무장투쟁만이 조국의 광복을 가져다줄 수 있다고 믿었다. 이것이 외교에 치중한 상해임시정부 노선과 차이이고, 도산 안창호가 전개한 수양운동을 통한 실력양성 노선과 비교된다. 이승만이 국제연맹 위임통치 청원 건으로 임시정부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자 후임 박은식은 대통령제를 국무령제로 바꿔 1925년 석주를 초대 국무령으로 선출했다. 처음에는 석주가 주저했는데 임시정부는 상해에 두고 군정부는 만주에 둔다는 합의로 국무령 직을 수락했다.
그러나 이듬해 사임하고 만주로 돌아왔다. 임시정부 체제정비를 위한 석주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독립운동 노선과 지방색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임시정부 내 파쟁의 불씨가 꺼지지 않아서다. 더구나 만주에서 무장 항일투쟁에 큰 공을 세운 김동삼·오동진·김좌진 등 6명이 국무위원에 임명됐어도 이들 중 일부는 동포가 절대다수인 만주를 떠나 국권을 회복할 수 없다면서 국무위원직을 사양했다. 석주도 이들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어 국무령 직을 사임하고 만주로 돌아왔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군이 만주를 장악하자 그의 무장투쟁 운동은 더욱 힘든 고난의 길을 걸어야 했다.
1932년에 들어서선 둘도 없던 동지 여준(呂準)과 이장녕(李長年)이 일본군에 의해 참혹하게 살해되자 석주는 이 아픔으로 곡기를 끊었다. 76세의 나이에 병환까지 겹쳐서였는데 “인생은 다할 때가 있으니 개의할 게 뭐 있느냐. 다만 피에 맺힌 한을 풀지 못해 선조의 영혼에 어떻게 사죄하겠느냐”라고 담담히 말한 뒤 “국토를 회복하기 전까지는 내 유골을 고국에 갖고 가선 안 되니 일단 여기에 묻고서 기다리도록 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독립투쟁의 현장인 길림성 서란현에 묻혔다. 이에 따라 그의 환국을 위해 멀리 안동서부터 찾아온 동생들은 빈손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리고 망명길에 오른 지 79년 만인 1990년 고국에 돌아왔다.
8월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그런데 만주에서 벌인 무장 항일투쟁을 깎아내리려는 사람들이 있다. 투쟁의 효용으로 말하면 일리가 없지는 않지만, 석주와 같은 지도층 인사가 전면에 나서 몸부림치지 않았으면 지금 대한민국의 운명은 어찌 되었을까? 승전국 처분에 맡겨져서 독립은 요원한 일이 되지 않았을까? 제2차 세계대전 후 지도상에서 사라진 약소국들이 적지 않음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일제하 무장독립투쟁이 바위에 달걀을 던지는 무모한 행동이었을지 몰라도 지금 대한민국의 눈부신 발전을 생각하면 이들의 굴하지 않은 정신이 빛날 뿐이다. 석주 이상룡 전시회가 내달 4일부터 한 달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