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목격한 대선 패배 정당의 가장 참혹한 장면은 1997년 12월의 한나라당이다. 이회창 후보가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후보에게 39만 표 차로 져 첫 수평적 정권 교체가 이뤄졌다. ‘호화 당사’로 불린 국회 앞 건물 전체가 충격에 휩싸였다. 일주일 남짓 당사는 쥐 죽은 듯했다. 기자실이 있던 3층만 북적북적댔다. 대선에서 진 정당이 초상집이 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초년병 기자 시절 기억이라 잔상이 오래간다. 이후 새누리당과 자유한국당, 미래통합당, 국민의힘을 거치며 보수 계열 정당은 차떼기와 선거 참패, 앞서 있었던 대통령 탄핵 등으로 위기를 맞았다. 아무리 큰 수렁이라도 우여곡절 끝에 반전의 출구를 찾곤 했다. 하지만 이번엔 “글쎄올시다”란 회의감만 드는 이유는 뭘까.
“이미 영남 자민련” 자조한다지만
반성 없는 국민의힘, 영남도 외면
영남 유권자들, 회초리 더 들어야
첫째, 너무 큰 사고를 쳤다. 계엄 선포 자체가 워낙 충격적이었다. 국민의힘이 “우린 아무것도 몰랐다”고 손사래를 치고 있지만 애초에 한 몸처럼 엮여 있던 관계이다 보니 계엄 선포와 그 이후 정국에서의 완전한 결백 주장이 먹혀들기 어렵다. 내란 특검의 수사가 진척될수록 당의 전열이 요동칠 가능성이 크다. 계엄뿐이 아니다. 윤 전 대통령 재임 시절 당정 관계엔 상식적인 국민들이 이해하지 못할 부조리와 모순이 다반사로 일어났다. 역대급 참패로 끝난 지난해 4월 총선이 회생의 마지막 기회였지만 당도, 윤 전 대통령도 반전이 아닌 자폭의 길로 폭주했다.
둘째, 얼굴들이 너무 두껍다. 대국민 사과 한 번 없이 “다 이기고 돌아온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뭐 어차피 (대통령) 5년 하나 3년 하나”라고 외쳤던 그분의 염치는 논외로 치자. 그의 치하에서 ‘윤핵관’ ‘찐윤’ ‘언더친윤’으로 권세를 누렸던 이들의 행태는 그 못지않게 심각하다. 지난 대선 당시 한밤의 후보 교체 파문 등 아노미의 책임을 져야 할 거물들은 여전히 기세등등하다. 또 아무리 사람이 없다 하더라도 ‘윤석열 대통령실’의 얼굴로 논란의 중심에 섰던 이가 당직자 완장을 차고 TV에 등장한다. 대선후보로 나섰던 패장도, 당정 갈등 자중지란을 초래한 핵심 인물도, 상식 밖 행동으로 중도층 국민들의 손가락질을 받은 중진들도 대표 출마를 검토 중이다. 친윤들이 생명 연장의 대리인을 찾고 있다는 소문도 돈다. 그들의 사전엔 ‘자숙’ ‘자제’ ‘책임감’이란 단어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건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에 앞장서 반대했는데, 1년 후에는 ‘의리 있다’고 하더니, 그다음엔 다 찍어주더라”는 인식에 집단 최면이라도 걸린 건가. 윤 전 대통령의 과오와 단절하자는 혁신위원장의 지극히 당연한 제안까지 먹혀들지 않는다니, 백약이 무효란 말만 떠오른다.
3주 전쯤 지인 모임에서 윤석열 정권 고위직 출신으로부터 “‘이·영·자 당’이란 말을 들어봤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국민의힘 강세 지역인 서울 강남권 당원들 사이에서 ‘이미(이) 영남(영) 자민련(자)’의 앞 글자를 딴 자조적 별칭이 번지고 있다는 얘기였다. 영남당으로 쪼그라든 당의 현실을 과거 대전·충청 지역에서만 맹위를 떨치다 소멸했던 자민련에 빗댄 표현이다. 김근식 국민의힘 송파병 당협위원장도 공개적으로 이 말을 쓴 적이 있다.
그런데 최근 3주간의 흐름을 보면 이 호칭도 국민의힘엔 과분하다. 영남 지역에서도 국민의힘 지지율이 더불어민주당에 밀린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다. 이 지역에선 이재명 대통령 직무 수행 긍정 평가가 부정 평가의 두 배다. 이미 이 당은 ‘이·영·자’ 밑으로 추락하고 있다.
그동안 선거 때마다 국민의힘의 기사회생을 도왔던 영남 유권자들에게도 한 말씀 드린다. 진정으로 보수 정당을 아끼고 응원하신다면 이들에게 더 혹독한 채찍을 들어 주시라. 막연하고 알량한 동정심보다 “다음 선거에선 단 한 석도 안 주겠다”는 극약처방이 중병을 앓고 있는 이 염치 없는 정당의 치료엔 훨씬 더 효과적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