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닫기

시작은 파리 마구간이었다…물방울 화가 초기작 전시

중앙일보

2025.07.14 08:30

  • 글자크기
  • 인쇄
  • 공유
기사 공유
‘내 속에 꿈틀거리는 한 가닥 진심’에 나온 김창열의 초기작 ‘제전’(1967·오른쪽부터), ‘현상’(1971). 권근영 기자
캔버스에 알알이 맺힌 듯한 물방울, 합쳐져 커지고 또르르 흘러내릴 듯한 물방울, 스며들어 흔적만 남은 물방울….

시작은 파리 외곽의 마구간이었다. 1969년 프랑스에 간 김창열(1929~2021)이 작업실 겸 거처로 삼은 곳이다. 화장실도 없어 밖에 담아둔 물로 세수하던 어느 날 아침, 옆에 뒤집어둔 캔버스에 물방울이 튀었다. 캔버스 뒷면에 맺힌 크고 작은 물방울에 햇빛이 비쳐 찬란한 그림이 됐다.

제주도립 김창열미술관에서 열리는 두 전시에서 ‘물방울 화가’의 시작을 볼 수 있다. 먼저 20일까지 열리는 ‘물방울의 방 1972~83’에는 1972년작 ‘물방울 PK73002’부터 1983년까지 11년간 이어진 초기 물방울 10점을 걸었다. 1970년대 물방울 시리즈는 물방울이 캔버스에 맺혀 있는 듯한 착각을 부른다. 다가가면 그저 캔버스에 물감 찍어 놓은 모습, 그 공허함이 관객의 발길을 더욱 잡아 끈다.

서울 평창동 자택 작업실의 김창열. ‘김창열 화가의 집’으로 개관한다. [사진 김창열미술관]
스프레이로 뿌리는 기법을 쓰던 당시의 작업을 김창열은 ‘초사실주의적 작업’이라 불렀다. 1970년대 후반 이후 스프레이를 놓고 붓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맺히기만 하던 물방울도 표면에서 흐르고 흡수되는 다양한 물리적 형상이 됐다.

김창열은 1929년 평안남도 맹산에서 태어나 해방 공간의 혼란기에 월남했다. 이쾌대의 성북회화연구소에서 그림을 배워 1949년 서울대 미대에 입학했다. 6·25로 학업이 중단되자 1951년 경찰전문대학에 들어갔다. 군에 가는 대신 경찰이 됐지만 공비 토벌에 동원됐고, 4·3 사건의 상흔이 생생한 제주에서 1년 반을 근무했다. 전쟁이 끝나고 학교로 돌아가려 했지만 월북 화가 이쾌대의 조교로 있던 경력이 문제가 됐다. 1962년까지 경찰전문학교 도서관에서 근무하며 틈틈이 그렸고, 1965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참가 후 뉴욕에 눌러앉았다. 1969년 파리로 넘어갔다. 어두운 화면 한가운데 물방울 하나가 맺혀 있는 ‘밤에 일어난 일’(1972)이 첫 물방울 그림이다.

“치유되지 않는 상처는 아직까지도 날 아프게 한다. 특히 6·25 전쟁의 상처는 너무나 깊다”라고 1997년 돌아봤듯 전쟁의 상처, 혼자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이 물방울을 지배하는 눈물의 정서다. 물방울은 그에게 수행이자 진혼, 속죄였다.

다음 달 24일까지 열리는 김창열·하인두 2인전 ‘내 속에 꿈틀거리는 한 가닥 진심’에는 ‘제사’(1964)·‘제전’(1967) 등 물방울 이전의 그림들이 나왔다. 하인두(1930~89)는 김창열보다 한 살 아래로 당시 20대 청년 작가의 기수였다. 그의 운명은 1960년 바뀐다. 길에서 우연히 만난 집으로 데려온 지인(당시 민족일보 부산지국장)이 경찰에 체포됐고, 신고하지 않은 하인두는 국가보안법상 불고지죄로 체포됐다. 옥살이 후 사회적 고립,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리던 그의 곁에 끝까지 머문 친구가 김창열이었다.

“나의 재판장엔 가족들과 단 한 사람의 친구가 있었다. 김창열이었다. 그 각별한 정의(情誼)를 평생 잊을 수 없다”는 게 하인두의 회고. 활동이 제한된 하인두는 전통과 동양정신을 탐구하며 ‘만다라’ 시리즈를 남겼다. 전시에선 어딘가 닮았던 두 사람의 초기작 등 23점을 볼 수 있다.





권근영([email protected])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