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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 "부끄러움은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몫"

연합뉴스

2025.07.15 0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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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 "부끄러움은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몫"

(서울=연합뉴스) 최재석 선임기자 = 자신을 성폭행한 남성들을 법정에서 공개 증언한 여성이 프랑스의 최고 영예 훈장을 받는다는 소식이 눈길을 끈다. 용기 있는 여성의 존재를 새삼 깨닫게 하는 데다 프랑스 사회의 훈장 쓰임새가 부럽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훈장의 주인공은 올해 72세의 지젤 펠리코다. 지젤이 받은 최고 훈장 레지옹 도뇌르는 "공공의 이익을 위해 헌신한 인물"에 수여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는 남편의 사주로 50여명에게 성폭력을 당했다는 사실을 지난해 공개 증언한 후 '용기의 상징'으로 프랑스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주목받았다.

지젤이 남편과의 평온한 삶이 깨진 것은 2020년이다. 남편은 그해 슈퍼마켓에서 여성을 불법 촬영하다 체포됐고 조사과정에서 그의 전자기기에서 수많은 범죄 영상이 발견됐다. 남편이 9년간 지젤에게 수면제 등의 약을 먹여 의식을 잃게 한 뒤 온라인을 통해 모집한 남성들을 불러 성폭행하도록 하고 그 장면을 촬영한 영상들이었다. 지젤은 이 사건 재판에서 피해자의 익명 보장 권리를 포기하고 이름과 얼굴을 드러낸 채 법원에서 피해 사실을 증언했다.

그는 지난해 9월 법정에서 "나는 다른 성폭력 피해 여성들이 '지젤도 해냈으니 할 수 있다'고 느끼길 바랐다"며 "부끄러움은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의 몫"이라고 당당히 밝혔다. 이 사건은 프랑스 사회에 큰 충격을 줬다. 가해자들이 '특이한 괴물'이 아니라 '평범한' 남성이라는 점에서 특히 그랬다. 당시 BBC 보도 등에 따르면 기소된 남성들은 나이나 직업, 사회적 계층 등에서 뚜렷한 공통점이 없었다. 트럭 운전사, 군인, 소방관, 농부, 언론인 등 직업도 다양했다. "작은 시골 동네에서 살던 이들은 낯선 침실에 의식을 잃은 채 누워 있는 어느 낯선 여성과 성관계하라는 우연한 초대를 기꺼이 받아들였다"고 BBC는 평했다.

프랑스 법원은 지난해 12월 지젤의 남편에게 징역 20년을, 성폭행에 가담한 남성들에게는 3∼15년 형을 각각 선고했다. 1심 판결 후 지젤은 성명을 통해 "이제 남녀가 똑같이 모두 존중과 상호 이해 속에 살 수 있는 더 나은 미래를 찾을 우리의 역량을 신뢰한다"고 말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도 "지젤의 품위와 용기는 프랑스와 전 세계에 감동과 영감을 줬다"고 감사를 표했다. 한 평범한 여성의 용기가 성폭력에 대한 프랑스 사회의 인식을 바꿔놓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프랑스 혁명 기념일(7월14일)에 맞춰 수여한 영광스러운 훈장의 주인공 589명 가운데 지젤이 포함된 것은 변화된 사회적 분위기의 결실이었다.

한국 사회는 성폭력 문제와 관련해 비동의 강간죄를 둘러싼 논란이 진행 중이다. 강간죄의 판단 기준을 '상대방 동의 여부'로 변경하자는 취지의 비동의 강간죄 법안이 역대 국회에서 여러 차례 발의됐지만 모두 상임위 문턱조차 넘지 못했다. 지난달 대선에서도 잠시 거론됐다가 잠잠하다. 강선우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도 비동의 강간죄에 대해 청문회 서면 답변에서 "입증 책임의 전환 우려 등을 이유로 반대 의견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사회적 합의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14일 강 후보자에 대한 청문회 과정에서도 여야 모두 이와 관련된 언급은 없었다.

정치권은 여야 모두가 민감한 젠더 이슈에 대해선 선명한 입장을 드러내길 꺼린다. 그때그때 지지층의 눈치를 살피고 정치적 유불리를 따지는 모양새를 취하기 일쑤다. 정치가 민감한 이슈에 대한 본질적인 해결에 나서지 않는 사이 선량한 피해자가 계속 생기지 않을까 걱정이다.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성명을 내고 "'사회적 합의'는 사회적으로 진전된 시민들의 인식과 삶을 반영하는 적극적 인권 의제를, 일부 기득권 세력의 반대에 눈치 보며 정치권이 가로막을 때 쓰는 용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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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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