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과 러시아 관계가 ‘피로 검증된 혈맹’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 올해 들어 세 번째인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안보 서기의 지난달 방북을 계기로 양측은 북한 전투 공병과 군사건설 인력 등 6000명을 추가 파병하기로 합의했다. 지난달 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북·러 조약 체결 1주년을 맞아 평양을 방문한 러시아 문화부 장관과 함께 우크라이나 전선에 투입됐던 북한 특수작전군 전사자를 추모했다.
북의 전략적 뒷배, 러 영향력 커져
한·미 동맹에 비용분담 불가피
러·우 특사 동일인 파견 검토하길
북한의 인민 가수 김옥주가 북한 파병 장병의 헌신과 희생을 기리는 추모곡을 열창하던 순간 평양 4·25 대극장의 대형 스크린에는 김 위원장이 울먹이며 북한군 유해를 맞이하는 영상이 공개됐다. 지난주 최선희 북한 외무상은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교부 장관을 강원도 원산으로 초청했다. 라브로프 장관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을 대신해 “북한의 영웅적인 장병들이 피와 생명을 바쳐 쿠르스크를 해방하는 데 기여했다”고 극찬했다.
이에 최 외무상은 북·러 포괄적 전략동반자 관계 조약은 전투적 형제애의 기반이라고 화답했다. 북·러 관계가 사실상 혈맹, 핵 기반 동맹의 서막을 열었다. 라브로프 장관은 한반도 문제와 관련해 “북한이 수용할 수 있는 틀 내에서만, 북한의 관심 사안에 대해서만 행동하겠다”고 말했다. 이 말은 북·미 및 남·북 대화가 재개될 경우 러시아가 북한의 입장을 최대한 반영하는 방식으로 개입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친 것으로 풀이된다. 김 위원장의 의사 결정에 푸틴의 영향력이 더 커질 수 있다는 얘기다.
북·러 밀착에 대응하려면 투 트랙 병행이 필요하다. 첫째, 한·미 동맹과 한·미·일 안보 협력을 강화해 북·러 동맹을 압도하는 직접 전략이다. 둘째, 남북 대화 재개 및 한·러 관계 개선을 통해 북·러 관계를 이격시키는 간접 전략이다. 트럼프 2기 들어 한·미 군사동맹을 더욱 굳건하게 확립하려면 ‘비싼 평화’에 상응하는 일정 수준의 비용 분담이 불가피해 보인다. 이재명 정부는 철저한 검증을 통해 미국의 요구를 선별적으로 수용하되 주한 미군 규모 유지 등 연합 방위태세 확립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댄 케인 미국 합참의장은 지난주 한국에서 처음 열린 한·미·일 합참의장 회의(Tri-CHOD)에서 3국 안보협력의 정책 목표를 대북 억제력 확립에서 중국 위협 대응으로 전환할 필요성을 강조하며 동맹국들의 책임 공유를 촉구했다. 그동안 미국은 한국의 안미경중(安美經中) 접근 방식에 대해 반복적으로 경고해왔고, 한국은 진보·보수 정권을 막론하고 전략적 모호성으로 일관해왔다. 대북 억제력 확립은 물론 주변국의 잠재적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서도 한·미·일 협력은 중요한 안보자산이다. 한반도 전략 상황과 국격·국익을 고려한 정치적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다.
새 정부 출범 이후 대북 확성기 작전 중단과 민간단체의 대북 전단 살포 금지 등 남북 대화 재개를 위한 선제 조치를 하고 있다. 범정부 차원의 남북대화 준비TF를 구성해 문화·체육·의료 등 낮은 수준의 교류협력 및 인도적 지원 사업을 먼저 추진한 뒤 점진적으로 남북 군사회담 등 높은 수준으로 연결해 나가야 한다.
북·러 혈맹관계 확립을 계기로 남북 관계 등 한반도 전반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이 커졌다는 진단이 나온다. 북한이 트럼프 대통령의 여러 차례 대화 요구에 반응하지 않는 배경엔 러시아라는 전략적 뒷배가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북·미 대화와 남북 관계 개선을 견인할 수 있는 중재자는 러시아가 유일하다. 대통령실은 이달 중 미국·일본·중국 등 14개 국가에 특사를 파견하기 위해 상대국들과 협의를 진행 중이다.
이참에 러시아에도 특사 파견 방안을 전향적으로 검토해 우크라이나전쟁 이후 경색된 한·러 관계의 물꼬를 틀 필요가 있다. 러시아 특사에게 우크라이나 특사 임무를 동시에 부여해 양국을 연계 방문할 경우 평화를 지향하는 중재자로서 대한민국의 책임 있는 역할을 대내외에 과시하고, 한·러 관계 개선에 대한 국제사회의 우려를 완화하는 명분도 확보할 수 있다. 정치와 외교에서 철저히 감정을 배제하고, 국민주권과 국익이라는 실용의 관점에서 새 정부 앞에 놓인 각종 장애물을 지혜롭게 극복해 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