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땅에서 꿈 좇은 어머니
함께 꿈꾼 아들이 완성한 농장
'폭싹''도깨비' 등 촬영 명소 돼
다른 가치 발굴로 농촌을 바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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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농부.
경제관료 출신 유력 정치인(진의종 전 총리·1921~1995)을 아버지로 둔 금수저 엘리트가 어릴 적부터 꿔온 평생의 꿈은 의외로 농부였다. 아버지가 반대하든 말든 버려진 땅을 헐값에 사 농경지로 개간한 여장부 어머니(이학·1922~2004)의 꿈이 사남매 둘째에게 그대로 이식됐다. 아들은 당연히 농대(서울대 농경제)에 갔다. 그리고 졸업식 바로 다음 날 아버지 고향이자 어머니 꿈의 발판인 전북 고창에 내려가 농사를 지었다. 아니, 사실 농사는 못 지었다. 돈·경험·지식 없이 꿈만 있는 청년 앞에 아무리 넓은 땅이 있어도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이웃 농사 도우며 1년 반 가까이 겨우 밥벌이하다 서울로 돌아갔다.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속았수다'(2025) 배경으로 올해 더 주목받은 한국 경관 농업 개척자이자 고창 학원농장주 진영호(75) 고문의 젊은 시절 얘기다. 그는 막 서울에 입성한 광주 회사(금호실업)의 1호 신입사원이 됐고, 회사가 대기업으로 성장하는 동안 상사맨 능력을 인정받아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회장 부속실에서 임원을 달았는데,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란·일본 등을 누비면서도 늘 "언젠가 돌아간다"고 마음먹었던 바로 그 '언젠가'가 왔다는 걸.
21년 전처럼 사표 던진 바로 다음 날 고3 딸과 아내는 서울에 두고 먼저 고창에 왔다. 때는 우루과이라운드(UR·WTO 체제 낳은 다자간 무역협상) 핵심 쟁점인 농산물 협정(블레어하우스 협정) 체결을 앞두고 농민들의 농산물 수입 개방 반대 시위가 절정에 달했던 1992년이다. 당시 김영삼 민자당 대선 후보와 맞붙은 민주당 김대중 후보가 "수입하면 농촌 망한다"고 아무리 외쳐도 개방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였다. 대한민국 농촌이 변해야 한다면 농촌에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33년이 흘렀다. 망한다던 농촌은 농업 인구 급감 속에 농업 생산액이 64배 성장, 60조원을 넘겼다. 진 고문 역시 빈털터리로 쫓겨날 위기 끝에 학원농장을 사시사철 청보리·해바라기·메밀밭 명소로 만드는 등 새 수익모델을 제시해 여기 일조했다. 다시 농산물 개방 압력이 거센 지금 그의 삶이 궁금했다. 지난달 27일 고창에서 만나 들은 인생 이야기를 그의 시각에서 정리했다. 안혜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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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일단 꾸어야 한다
'축 서울농대 진영호 세계여행 출발. '
가정교사 등 구인·구직 지면에 이렇게 두 줄 신문 광고를 냈다. 여행은커녕 유학·이민 아니면 공무로도 외국 나가기 힘들던 1960년대에 꼭 세계여행이 하고 싶어 친 배수진이었다. 다들 "무슨 자격으로 가느냐"고 수군댔고, 당시 고향에서 출마해 정계 입문하려던 아버지 귀에까지 들어갔다. "여행 허가받을 방법이 없어 일단 저질렀다"는 말에 아버지는 어렵게 길을 만들어줬다. 서예가로 활동하던 어머니의 도쿄 전시 수행원 자격으로 60일짜리 단수 여권을 받았다.
도쿄 하네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본 지도부터 충격이었다. 그 시절 한국에선 중국을 "중공 오랑캐"라며 무시했는데, 정작 거대한 중국 한 귀퉁이에 붙은 작은 점이 한국이었다. 세상을 보는 시야가 완전히 달라졌다. 60일을 꽉 채워 둘러본 일본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당장 일어 공부를 시작했다. 그땐 몰랐지만 나중에 일본 지사 적응은 물론 경관 농업 성공의 밑거름도 됐다. 이 분야 선진국 일본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니 '꿈'이 인생 키워드였다. 치기 어렸지만 어쨌든 꿈꾼 덕분에 대학 시절 한국 밖 세상을 처음 봤다. 또 어릴 적 꿈을 항상 품고 살았기에 남다른 농부가 될 수 있었다.
사실 이 꿈 시작은 어머니였다. 함평 천석꾼 막내딸로 태어나 가정 건사하면서도 그 시절 여자답지 않게 직접 돈 벌어 서예·자수 등 하고 싶은 활동 다 하며 자기 인생을 스스로 개척한 맹렬 여성이었다. 뭘 하든 "땅은 거짓말 안 한다"며 땅에 대한 애착이 컸다. 아버지는 달랐다. 도시 생활을 더 맞았다. 선거 운동하느라 오가던 땅이 헐값에 나오자 덥석 산 것도 아버지 아닌 어머니였다. 박정희 정부의 개간사업에 발맞춰 어머니는 일꾼 부려가며 구릉 지대였던 이 일대를 농경지로 바꿨다. 지금처럼 차가 있는 것도 아니고 정읍역에서 기차 내려 버스 갈아타고, 도로 끊긴 곳부터는 다리도 없는 개울 건너 한참 더 걸어야 닿는 외진 곳이었지만 수시로 들락날락하며 모든 일을 지휘했다. 개척이 어머니에겐 재미이자 꿈이었다. 하지만 서울·고창을 오가는 삶은 쉽지 않았다.
고2 때 어머니가 물었다. "네가 농장 맡아 해볼래?" 두 번도 고민 안 했다. "네. " 모자가 함께 '에덴의 동쪽'이나 '자이언트' 같은 영화 보며 "우리도 저렇게 멋진 농장 만들자"고 뜻을 맞췄기에 농장은 이미 내 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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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기왕이면 달라야 한다
어김없이 올봄에도 청보리밭 축제가 열려 3주 동안 고작 인구 5만인 고창에 50만 넘는 외지인이 몰려왔다. 봄이면 청보리·유채, 여름은 해바라기, 가을엔 메밀꽃 보러 수십만이 찾아오는 덕분에 고창군은 매년 1억원 남짓 질서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예산만 쓰고도 수백 억원의 경제 효과를 누린다. 새벽부터 차량 행렬이 몇 ㎞나 이어져 마을 주민들 민폐를 걱정하지만 처음부터 이런 모습은 아니었다. 오히려 실패와 좌절의 연속이었다.
꿈을 꾸는 것과 꿈을 현실로 만드는 건 완전히 달랐다. 막상 해보니 농사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대졸 직후 첫 실패 때와 달리 대기업 19년 다니며 모은 돈에, 세계를 상대로 영업한 경험, 농업기관·농가 쫓아다니며 배운 농사 지식까지 있었지만 아무 대책 없는 무일푼 청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귀농 첫해 12만 포기나 심었던 수박은 20일 넘게 인부 100여명을 써야 할 만큼 인력이 많이 필요했다. 비용 들인 만큼 큰 소득을 기대했는데 10년만의 냉해가 닥쳐 손해만 보고 바로 접었다.
수박밭 한쪽에는 비닐하우스 2000평(6600㎡)을 지어 카네이션 같은 화훼도 동시에 재배했다. 물건 좀 팔아봤다고 시장만 고려해 운송비 적은 고소득 작물을 고른 건데, 알고 보니 투기성 작물이었다. 하우스도 800~1000평(3300㎡)당 두 명꼴로 인력이 꽤 드는 데다 IMF 외환위기를 거치며 유가가 급등해 난방비까지 치솟아 비용이 많이 드는데, 성수기 출하 무렵이면 값싼 중국산이 쏟아져 가격이 폭락하길 반복했다. 많이 재배하면 나을까 싶어 5000평(1만6500㎡)까지 증설했지만 2005년 결국 손을 들었다.
13년 공들인 화훼 농사로 경영이 나아지기는커녕 번 돈 쏟아붓고 농장 땅 담보로 빚 돌려막기 하다 맨몸으로 쫓겨나가기 일보 직전까지 몰렸다. 그야말로 설상가상, 폭설로 하우스가 전부 무너졌다. 울고 싶던 차에 뺨 맞은 셈이라 오히려 속이 시원했다. 원래 재해로 하우스가 무너지면 똑같이 다시 지어야 정부가 보상해 주는데,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된 덕에 피해만 입증하면 시설 재건의무 없이 50%를 더 보상받았다.
첫 작물 수박을 진작 접은 데 이어 화훼마저 처참한 실패였다. 그렇다고 주저앉을 순 없었다. 다른 시도를 해야 했다. 2003년 가을 돈은 안 되지만 보기엔 좋은 메밀을 시험 삼아 농장 중심의 4만평(13만2000㎡) 땅에 심었는데, 이게 기적의 씨앗을 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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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포기 안 하면 결국 이뤄진다
수박의 실패는 돌아보니 성공의 시작이었다. 혼자 힘으로 농사지을 수 있는 작물 아니고선 살아남을 수 없다는 교훈을 얻었기 때문이다. 농기계 써서 혼자 10만 평(33만㎡) 이상 농사지을 수 있는 작물을 심어야 했다. 그게 청보리였다.
수박에서 청보리로 바꾼 후 일본서 본 경관 농업이 생각나 준비 없이 관광농장을 신청했는데 덜컥 선정됐다. 부랴부랴 조건 맞춰 부대시설을 지었지만, 하루 200명도 오지 않았다. 허름한 시설조차 과잉투자로 보였다. 그나마도 가을 콩밭이 되면 관광객 발길이 뚝 끊겼다. 가을에도 사람을 불러모을 작물이 필요했다. 메밀이 떠올랐다. 문제는 수확하면 제법 돈이 되는 콩과 달리 메밀은 농작 수입을 기대할 수 없었다. 그래도 사람 모으는 게 우선이었다. 콩 대신 메밀을 심었다.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운도 따랐다. 마침 공공기관·대기업을 시작으로 주 5일제가 시행돼, 주말 나들이 나온 사람들이 메밀꽃 보겠다며 구름떼처럼 몰렸다. 막힌 길 뚫느라 교통경찰에 관공서 공무원들까지 동원됐다. 이럴 바에야 "같이 축제를 하자"며 군이 예산 3000만원을 편성, 2004년 제1회 청보리밭축제가 열렸다.
첫해부터 무려 27만, 3회 만에 40만을 넘었다. 그런데 난 아쉬웠다. 봄의 청보리·유채, 가을 메밀을 잇는 게 필요했다. 청보리밭축제 10주년인 2013년 농장 중심 4만평을 양분해 시차를 둬 해바라기를 심었다. 여름 한 달 내내 장관이 펼쳐졌다. 평론가들이 CG로 착각했던 영화 '협녀, 칼의 기억'(2015) 속 배우 김고은이 훈련하던 바로 그 해바라기밭이다. tvN '도깨비'(2016)의 메밀꽃밭, MBC '연인'(2023)의 청보리밭, '폭싹 속았수다'의 유채밭도 여기라는 게 알려지며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찾는다.
돈 잡아먹는 귀신은 황금알까지는 아니어도 돈 버는 거위로 탈바꿈했다. 농사로는 여전히 비용과 수입이 거의 비슷하지만 1년에 4~5개월만 운영하는 작은 식당과 카페가 몇 배의 매출을 올리기 때문이다.
장황하게 인생을 펼친 건 이 얘기를 하고 싶어서다. 농사만 지어선 여전히 가난을 면키 어렵다. 생산량을 확 늘릴 수도, 판매단가를 올릴 수도 없지 않나.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내가 했던 것처럼.
청보리밭축제 10주년이던 지난 2013년 농업인의 날에 최고 등급인 금탑산업훈장을 받았다. 나 개인의 영광을 넘어 이 땅의 다른 농부에게 주는 희망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