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닫기

[중앙시평] 한국의 첨단 제조업 어떻게 살릴까

중앙일보

2025.07.15 08:28 2025.07.16 00:19

  • 글자크기
  • 인쇄
  • 공유
기사 공유
김병연 서울대 석좌교수 경제학부
첨단 제조업은 한국의 먹거리이자 살 거리다. 경제성장의 동력이며 지정학 혼란기의 버팀목이다. 한국이 반도체·조선·방산·자동차·바이오 등 첨단 제조업의 중심국이 아니라면 이 위험한 시대를 무엇으로 헤쳐갈 수 있을까. TSMC라는 기업이 대만 안보의 핵심이듯 한국 안보의 중추는 첨단 제조업이다. 미국이 ‘제2의 애치슨라인’을 긋지 않고, 중국이 한국을 미국 중심의 공급망에서 떼어놓으려는 노력도 이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그런데 이대로 가면 한국의 제조업은 몰락한다. 한국도 같이 무너진다.

안팎의 도전으로 첨단 산업 위기
근로시간 규제 등 족쇄부터 풀고
인력과 산업, 대외 정책의 초점을
제조업에 맞추는 대전략 나와야
이재명 대통령이 리벨리온의 AI 반도체에 'AI 고속도로, 세계 3대 강국' 메시지를 남겼다. 연합뉴스

한국의 첨단 제조업은 공동화의 위기에 처했다. 중국의 기술력은 한국 추격을 거의 끝냈거나 이미 추월하기 시작했다. 막대한 ‘규모의 경제’ 덕택에 생산 단가가 낮다. 세계 최고 수준의 제조업 생태계가 갖춰져 있는 데다 인력도 풍부하다. 중국의 이공계 학부 졸업생 숫자는 미국의 4배 이상이며 OECD 회원국 전체에서 배출되는 이공계 인력보다 많다. 미국의 정책도 큰 도전이다. 경제 안보와 중산층 육성을 위해 첨단 제조업이 절실한 미국은 관세라는 수단을 써서라도 한국 기업을 국내에 유치하려 한다. 한국 제조업이 미·중의 협공에 직면한 셈이다.

한국 정치와 정책은 거꾸로 간다. 부가가치 기준 한국의 국민소득 대비 제조업 비중은 2010년대 초 28%에서 2023년 24%로 하락했다. 반면 대만은 제조업 비중이 같은 기간 25%에서 31%로 증가했다. 일인당 국민소득이 증가하면 제조업 비중이 감소하는 현상이 일반적이지만 대만은 이 추세를 뒤엎었다. 우리는 젊은 인구가 급속히 줄고 이공계 기피 현상과 인재 유출이 극심한 데도 정책은 역주행이다. 여당은 연구개발 인력을 대상으로 주 52시간 근로시간 제한을 완화해 달라는 기업의 요청을 거절한 데 더해 주 4일 근로제까지 논의하고 있다. 또 ‘서울대 10개 만들기’라는 예산 낭비가 확연히 보이는 희귀한 정책을 펴려 한다.

첨단 제조업을 위기에서 구할 대전략이 나와야 한다. 먼저 대학과 기업의 발을 묶는 족쇄부터 풀어야 한다. 한국 교수는 선진국에는 없는 각종 규제로 쓸모없는 일에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해야 한다. 정부와 정치는 사회주의식 통제로 대학의 손발을 묶은 다음 세계로 나가 자본주의 대학들과 뜀박질하라고 요구한다. 대학마저 이럴진대 기업에 대한 규제는 얼마나 심할까. ‘첨단 산업 구하기’는 연구개발 인력에 한정해 한시적으로라도 주 52시간 근로시간 제한을 완화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지역 거점 국립대의 서울대 만들기’를 굳이 한다면 이공계에 집중해야 한다. 그 대학에서 가장 경쟁력 있고 지역의 산업 생태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이공계 학과에 재원을 집중하되 탁월한 교수를 파격적인 연봉으로 초빙하는 데 중점을 둬야 한다. 뛰어나고 헌신적인 교수가 인재를 만든다. 그동안의 지방 대학 육성 정책은 좋은 교수를 초빙하기보다 재원을 학생들에게 나눠줬기 때문에 실패했다. 앞길이 창창한 학생들이 수천만 원의 장학금 때문에 수억 원의 평생 소득 차이를 낼 수 있는 서울 소재 대학의 진학을 포기하고 지방 대학에 남으려 하겠나.

산업 정책의 초점을 첨단 제조업과 인공지능(AI)의 결합에 맞춰야 한다. 첨단 반도체 산업을 제외하고 대량생산 경쟁에서 중국을 이길 나라는 없다. 대신 고부가가치의 틈새시장을 공략하는 산업 맞춤형 AI 전략을 펴야 한다. 이를 위해 첨단 산업 현장의 데이터를 모아 AI 학습에 이용하고 이를 다시 산업에 적용해 생산성을 끌어올려야 한다. 숙련공의 고령화로 시간이 별로 없다. 은퇴 이전에 이들의 노하우를 AI로 이식하지 못하면 기회는 사라진다. 기업 비밀의 노출을 우려하여 공공 플랫폼에 필요한 데이터 제공을 꺼리는 기업에는 과감한 인센티브를 줄 필요도 있다.
지난 4월 2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에 위치한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국가별 상호관세율을 발표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우리 대외전략의 핵심도 첨단 제조업 살리기에 두어야 한다. 미국과의 관세 협상에서도 첨단 산업의 공급망 강화를 주요 의제로 삼아야 한다. 미국은 설계, 한국은 생산이라는 기존의 효율적인 분업 구조를 큰 틀에서 유지하는 전략이 중국 대응에 효과적임을 알릴 필요가 있다. 생산 원가가 높은 미국이 첨단 제품을 직접 생산할 경우 오히려 중국의 가격경쟁력만 높여 세계시장을 더 내어주는 역효과를 낳는다. 이 설득이 통하지 않는다면 한국 첨단 산업의 추가적인 대미 투자보다 미국산 무기나 에너지를 더 수입하는 편이 낫다. 그리고 국민개병제인 한국의 국방비를 모병제 국가와 일률적으로 비교할 수 없음을 설명해야 한다. 만약 모병제로 전환한다면 한국의 국내총생산 대비 국방비 지출은 0.5% 포인트 이상 늘어난다. 무엇보다 한국은 누구의 아들이든 예외 없이 국방의 의무를 감당하는, ‘호국의 기백’이 살아있는 나라다. 한미 정상회담을 조속히 개최해 트럼프 대통령에게 자유를 지키려는 한국인의 의지는 미국 못지않게 강함을 알려야 한다.

김병연 서울대 석좌교수·경제학부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