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이 대만과 밀착하고 있다. 중국을 의식해 지난 수십년간 지켜왔던 ‘대만과 거리두기’ 태도를 버리고 군사·안보 분야를 중심으로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격화하는 중국과의 남중국해 영유권 갈등에서 협상력을 키우고, 중국이 대만을 침공할 경우 필리핀에 튈 수 있는 군사적 위협에 대비하려는 포석이란 분석이 나온다.
필리핀과 대만의 군사적 밀착은 최근 여기저기서 포착된다. 14일(현지시간)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올해 초 필리핀 국방부와 가까운 군사 분야 학자들은 대만 고위 장성들과 만난 비공개 포럼 자리에서 대만의 현 안보 상황을 브리핑 받았다. 특히 양국은 해상 협력을 강화 중이다. 필리핀 해안 경비대와 대만 해안 경비대는 최근 양국 경계인 바시 해협에서 공동 순찰을 실시했다.
지난달엔 대만 해군·해병대가 미국·필리핀·일본·한국 해병대 등이 필리핀에서 벌인 다국적 연합훈련인 '카만닥(KAMANDAG)'을 참관했다. 이번 훈련에선 대만 남쪽 끝에서 약 200㎞밖에 떨어지지 않은 필리핀 최북단 바탄섬에서 대함미사일 발사 연습을 했다. WP는 “필리핀군은 훈련이 특정 국가를 겨냥하지 않았다는 입장이지만, 전문가들은 중국의 대만 침공 대응 훈련으로 본다”며 “대만은 미 동맹국들 간 협력을 실시간으로 지켜봤다”고 전했다.
외교 협력도 강화하고 있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필리핀 대통령은 지난 4월 필리핀 정부 관계자가 대만 정부 인사들과 접촉하는 것을 금지하는 규제를 풀었다. 대만 국민의 필리핀 무비자 입국도 허용했다. WP는 “필리핀 정부는 공식적으론 대만 투자와 관광객 증진을 위한 것이라고 했지만, 필리핀 정부 관계자들은 (이들 조치가) 양국 안보 협력 강화를 뒷받침하는 역할도 한다고 밝혔다”고 전했다.
필리핀이 대만과 가까워지려는 배경엔 중국이 있다. 필리핀은 남중국해에서 중국과 해상 영유권을 두고 갈등 중이다. 중국 해안경비대 선박이 필리핀 물품 보급선 등에 물대포를 쏘고 필리핀 해경이 맞대응에 나서면서 긴장이 격화하는 게 대표적이다.
남중국해 내 암초에서 양국이 각각 자국 국기를 펼치고 찍은 사진을 공개하며 신경전도 벌인다. 필리핀 국가안보회의에 따르면 지난해 필리핀 서부 해안 해역에서 중국 선박 수가 눈에 띄게 늘었으며, 중국의 사이버 공격과 스파이 활동 위협도 커지고 있다.
필리핀은 중국이 민감해 하는 대만과의 협력으로 협상력을 키울 생각이다. 길버트 테오도로 필리핀 국방장관은 WP에 “우리 지역 안에서 중국이 무력행사를 하는 건 극도로 우려스런 일”이라며 “필리핀이 여전히 ‘하나의 중국’ 정책을 지키고 있지만, 필리핀과 대만의 운명은 점점 더 얽히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필리핀은 (중국의 남중국해 관련) 변화에 대응해 대만과의 관계를 진전시킬 권리가 있다”며 “이것이 중국의 분노를 불러일으킬 수 있지만, 지금까지 이웃의 강력한 국가(중국)를 달래려는 필리핀의 시도는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중국은 필리핀의 행보에 크게 반발하고 있다. 궈자쿤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최근 “대만 문제는 중국의 핵심 이익의 핵심”이라며 “필리핀이 대만 문제에 대해 도발을 하거나 불장난을 그만둘 것을 요구한다”고 했다.
중국은 필리핀이 미국과 군사 협력을 통해 대만 문제에 개입하려는 시도도 경계한다. 지난 4월 로미오 브라우너 필리핀 합참의장이 “중국의 대만 침공에 필리핀군이 대비해야 한다”고 발언하자 중국 외교부는 필리핀에 도를 넘지 말라는 경고를 했다.
최근 미군의 최신예 대함미사일 체계인 네메시스(NMESIS)가 필리핀에 배치된 것을 두고도 장샤오강 중국 국방부 대변인은 “필리핀은 미국의 전쟁 전차에 묶여 지역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공모자가 됐다”고 비난했다. 이에 말레이시아를 비롯한 동남아시아 국가들 중에선 필리핀의 행보가 중국을 자극해 지역내 미·중 갈등 상황을 악화시킬 수 있다고 우려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하지만 필리핀으로선 대만 상황이 남일이 아니다. 대만 남부와 수도 마닐라가 있는 루손섬과는 직선거리로 350㎞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더구나 대만에는 필리핀 노동자 15만 명이 거주한다. 유사시 이들의 안전도 위협받을 수 있다. 마르코스 대통령은 지난 2023년 “대만해협에서 (무력) 충돌이 벌어질 경우 필리핀이 관여하지 않는 시나리오는 생각하기 어렵다”며 “우리는 (대만 분쟁의) 최전선에 있다고 느낀다”고 말했다.
그레그 폴링 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동남아국장은 “중국은 필리핀을 미국의 꼭두각시로 생각했지만, 필리핀의 대만에 접근한 건 중국 때문”이라고 신문에 말했다. 중국이 남중국해 등에서 벌인 공세적 태도가 필리핀과 대만의 협력을 이끌어냈다는 분석이다.
━
중국 침공시 지하철로 방어?…대만, 중무장 훈련
한편 대만군이 중국의 무력 침공 가능성에 대비해 수도 타이베이 지하철을 활용한 실전형 병력 기동 훈련을 실시했다고 미 군사전문 매체 더워존이 14일 전했다. 대만군은 지난 9일부터 시작된 연례 훈련인 ‘한광(漢光) 훈련’에서 스팅어 미사일, 유탄발사기, 대전차 로켓 등으로 무장한 병력을 지하철에 투입했다.
대만 국방부는 “군이 지하철로 목표 지역에 신속히 도착해 적과 교전하는 모습을 시뮬레이션했다”고 밝혔다. 대만은 중국의 침공 시 135개 역과 약 150km의 길이를 가진 지하철을 병력 수송과 도시 방어의 핵심 수단으로 삼을 생각이다. 대만은 지난 15일엔 '항공모함 킬러'라는 별칭이 있는 사거리 400㎞의 대함미사일 '슝펑-3' 개량형도 공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