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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영의 과학 산책] 이름 없는 거인

중앙일보

2025.07.16 08:08 2025.07.16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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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영 고등과학원 HCMC 석학교수
미국 수학자 폴 할모스(1916~2006)는 친구와 함께 한 문제를 풀고 있었다. 그런데 친구는 몇 번 간단한 의견만 주었다. 얼마 후 할모스는 문제를 푸는 데 성공한다. 이때 그는 생각했다. 친구는 별로 한 게 없으니, 논문은 내 이름만으로 발표해야지. 결국 그는 단독으로 논문을 발표했다. 그런데 세월이 꽤 흘러 깨달았다. 발견의 착상이 한마디 말에서 불현듯 떠오를 수 있음을. 이 깨달음 후, 그는 논문에서 친구의 이름을 뺀 일을 인생에서 가장 큰 실수였다고 두고두고 후회했다. 오늘날 대부분의 수학 저널에서 공저자의 이름을 영어 알파벳 순서로 나열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일러스트=김지윤
과학적 성취에는 언제나 이름 없는 동행자가 있다. 그러나 할모스도 후회했듯 그들의 기여를 가볍게 여기기 쉽다. 태양중심설의 역사만 보아도 그렇다. 이 이론을 세우는 데 있어 가장 큰 난관은 무거운 지구가 어떻게 스스로 움직이는가 하는 의문이었다. 오랜 세월 사람들은 여러 개의 ‘천구’(투명하고 단단한 구체)가 차례로 하늘을 감싸고 있으면서 각기 서로 다른 행성들을 태워 운반한다고 믿었다. 그러던 중 한 사건이 일어난다. 1600년, 영국 물리학자 윌리엄 길버트(1544~1603)가 실험을 통해 구형 자석을 자기장 속에 넣으면 자석이 스스로 회전한다는 사실을 관찰한 것이다. 그리고 곧 지구가 거대한 자석이라고 주장하며 더는 천구 같은 구조물이 필요치 않다고 얘기했는데, 이것이 갈릴레오와 케플러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우리는 그의 이름을 잊었지만, 길버트는 태양중심설 탄생의 결정적 안내자였다. 그래서 뉴턴도 고백하지 않았던가. “나는 거인의 어깨 위에 서 있었다.” 발견의 길을 안내한 동행자는 참으로 이름 없는 거인이다. 다만 그 존재를 인지하지 못할 뿐. 깨우칠 땐 이미 늦었기 일쑤다. 과학적 성취 앞에서 늘 겸손해야 하는 이유다. 사실 인생의 모든 성취가 어찌 다를까. 박수를 받았거든, 고개를 숙여야 한다.

이우영 고등과학원 HCMC 석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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