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 괴산은 느티나무(槐)가 많아 괴산이라는 지명을 얻었다. 밭 몇 뙈기와 논 몇 마지기밖에 없어 생산성인 낮아 내가 소년 시절을 보낸 1940~50년대만 해도 메뚜기와 올갱이(다슬기)와 개구리 뒷다리가 단백질을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식품이었다.
추석과 구정 때 조기 맛을 보았다. 기차보다 비행기를 먼저 보았으며, 원효대사(元曉大師)와 송시열(宋時烈)과 홍명희(洪命熹)의 전설을 들으며 소년 시절을 보냈다.
1937년, 장연면의 오지에 최봉호(崔鳳鎬·사진)라는 소년이 태어났다. 넉넉한 가정은 아니었던 것 같다. 서울대와 하와이대, 그리고 미주리대에서 육종학을 공부한 뒤 여러 직장을 거쳐 충남대 교수로 자리 잡았다.
그에게는 늘 가난한 고향에 대한 추억과 안쓰러움이 남아 있었다. 1991년, 그는 옥수수 종자를 개량해 고향 군청에 종자의 특허권을 주었다. 이것이 오늘의 ‘대학찰옥수수’의 탄생이다. 알이 굵고 껍질이 엷으며, 당도와 식감이 좋아 곧 입소문을 타고 괴산의 명물이 되었다.
금년을 기준으로 1500 농가에서 1만t을 출하해 300억원의 소득을 올린다고 하니, 그뿐은 아니겠지만 가난한 농촌 도시로서는 허리가 펴질 일이었다. 보도에 따르면 그 최봉호 교수가 달포 전에 88세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세상은 그의 죽음을 주목하지 않았지만 괴산 시민들에게, 그리고 나에게는 감회가 깊다.
고향, 누구에게나 아름다운 추억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고향은 늘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의 말처럼, 슬픔도 때로는 그리워질 때가 있기 때문이다. 가난한 소년으로 고향을 잊지 않은 최봉호 교수는 자기를 낳아주고 길러준 고향의 은혜에 그렇게 보답했다. 나는 고향을 위해 뭘 했지
?
송덕비라도 세운다면 내가 그 비문을 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