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출간된 작가 한강의 산문집 『빛과 실』에는 우리가 이 자리에서 살펴본 노벨문학상 수상소감과 수상 강연문 외에도 2021년부터 2023년 사이에 쓰인 글들이 실려 있습니다. 한강에게 2021년 이후라고 하면 장편소설 『작별하지 않는다』의 출간 이후를 뜻하는데, 그 글들에서 저는 일종의 회복기를, 다시 말해 병이나 부상으로 인해 아팠던 상태에서 건강을 되찾아가는 것과 유사한 모습을 발견합니다.
이 회복기에서 제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눈 한 송이’의 이미지입니다. 먼저 ‘아주 작은 눈송이’라는 제목이 붙은, 형태상으로 시라고 할 수 있는 짤막한 글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아주 작은 눈송이, 너는/ 춤추듯/ 느리게 춤추듯이 왔지/ 내 얼굴로//다른 모든 눈송이들처럼 수직으로 떨어지지 않고/ 어쩐 일인지 내 얼굴을 향해 날개를 폈지//그리곤 어디로 가버렸니?/ 널 다시 보지 못했어”
한강의 글을 관통하는 이미지
눈송이의 속성은 녹는다는 것
생명의 온기에 닿아 녹는 시간
그 찰나가 구원을 암시하는 듯
모든 눈송이들이 수직으로 떨어진다면 그것은 바람이 전혀 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단 한 송이의 눈만은 내 얼굴을 향해 춤추듯 느리게 날아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이 눈 한 송이에는 자신의 의지가 있고 그 의지대로 행할 능력이 있는 것일까요? 이 눈 한 송이가 실제의 눈인지 상상 속의 존재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화자에게 이 눈 한 송이의 체험은 각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마치 갑작스럽고 강렬한 깨달음의 유일무이한 순간처럼.
눈의 물질적 성격은 여러 가지입니다. 많은 경우 순결한 눈이고 위안의 눈이지만, 때로는 공격적인 위협의 눈, 폭력의 눈이 되기도 합니다. 눈의 시각적 차단과 청각적 흡수도 때에 따라서 긍정적인 것이 되기도 하고 반대로 부정적인 것이 되기도 합니다.
한강의 눈 한 송이가 갖는 가장 중요한 성격은 녹는다는 데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녹는 눈이 생명의 온기를 증명해 주기 때문입니다. 수상 강연문에서 한강은 자신의 창작 메모 중의 다음과 같은 한 구절을 인용했습니다.
“생명은 살고자 한다. 생명은 따뜻하다./ 죽는다는 건 차가워지는 것. 얼굴에 쌓인 눈이 녹지 않는 것.”
그래서 작가 한강은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를 쓰는 동안 “살갗에서 눈이 녹는 감각을 기억하려고 손이 빳빳해질 때까지 눈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던 것입니다.
앞에 인용한 시의 마지막 행에서 눈 한 송이가 어디로 가버렸는지, 왜 다시 보지 못하게 되었는지를 이제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 눈 한 송이는 내 얼굴에 닿아 녹은 것입니다. 녹으면서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해 준 것입니다.
하지만 한강의 눈 한 송이는 이때 처음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2015년에 발표된 단편소설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에 아름다우면서 슬픈, 혹은 슬프면서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타난 적이 있습니다. 작중화자는 여성 작가이고 그녀가 쓰는 희곡의 한 장면은 다음과 같습니다.
“함께 있어주세요, 소녀가 말한다./ 젊은 승려가 멀찍이 떨어져 서서 대답한다./ 그건 안 된단다./ 제발.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만./ 소녀는 나무 욕조의 물속에 들어가 있는데, 이상하게도 그녀의 머리에 쌓인 눈이 녹지 않는다. (…) 승려가 묻는다./ 왜 머리 위 눈이 녹지 않을까?/ 시간이 흐르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우리가 시간 밖에 있으니까요.”
이 장면이 작중화자 ‘나’의 다음과 같은 현실 장면과 겹쳐집니다.
“나는 힘주어 바깥쪽 창문을 열었다. 방충망까지 열고 바깥으로 손을 내밀었다. 찬 눈송이가 손바닥에 내려앉았다가 곧 사라졌다.”
그리고 ‘나’를 찾아온 옛 직장 선배의 유령이 곁에 와 나란히 서자 ‘나’는 다음과 같이 독백합니다.
“이제 손을 꺼내 눈을 향해 내밀려는가, 나는 생각했다. 죽은 사람의 손은 얼마나 차가울까. 거기 닿은 눈은 얼마나 오래 머물러 있을까. 눈 한 송이가 녹지 않는 동안, 우리가 얼마나 더 이야기할 수 있을까.”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 혹은 녹지 않는 동안이라는 찰나의 시간 속에 구원의 상징이 암시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을 눈 한 송이의 미학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한강은 2021년 12월 19일자 메모에 “기와에 쌓인 눈이 햇빛에 녹으며 홈통으로 흘러내리는 소리를 듣는다. 음악 같다”라고 썼습니다. 흔하다 할 수 있는 이 연상을 눈 한 송이의 미학이 각별하고 절실한 것으로 만들어줍니다. 이 연상에서 저는 따스한 위안을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