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 있을 때는 열심히 공부도 하고 A 학점을 받기도 했습니다. 여러 해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다 잊어버리고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이야기가 뜻밖이네요. 나는 대학 때 들은 강의나 독서 내용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데” “선생님이야 기억력이 특출하시니까 그렇지요, 우리는 보통 다 그렇습니다” “그런 게 아니고 우리는 대학에 가는 목적이 확실했고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그 문제 해결이 학문으로 된 거지요. 그런데 지금은 남이 가니까 나도 가고, 대학에서도 고등학교 때와 같은 공부만 하니까 학문이 되지 못한 겁니다”, 이런 내용이다.
지도자의 무지, 사회악 될 수도
원수 갚는 정의는 대립만 불러
열린 사고와 창조적 식견으로
인간다운 삶 회복의 희망 줘야
역사 변화에 휩쓸리지 않는 신념 필요
뉴스를 보니까 국회의원 80여 명이 경제 공부를 하기 위해 모인다고 한다. 현대인들 대부분은 TV나 신문을 통해 정보를 얻는다. 그 정보가 단편적인 지식이 된다. 그런 정보가 너무 많으니까 정보 이상의 지식은 갖추기 힘들다. 그 같은 빈곤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다시 강의를 듣고 지식을 넓혀간다면 좋은 일이다. 그러나 사회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문제의식을 느끼고 체계 있는 독서를 해야 한다. 상식적인 지식은 누구나 갖고 있지만, 자기 사상을 갖고 살면서 일해야 한다. 그 사상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공동체 안에서 나는 누구이며 무엇을 해야 하는가, 역사의 변화에 휩쓸리지 않고 나 자신의 신념을 갖고 있는가, 하는 문제의식이다. 지성을 갖춘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세계 속의 한국, 역사 안에서 현재의 과제를 찾아가는 열린 사고와 창조적인 식견이 필수적이다. 그래서 지도자의 무지는 사회악이 될 수도 있다. 상식을 갖고 일반인들과 함께 살면서도 많은 사람이 인정하고 따를 수 있는 사상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역사적으로 그런 과정과 식견도 갖출 문제의식을 모르고 지냈다. 세계 속의 한국보다는 국내에서 집단 간의 세력 싸움에 여념이 없었다. 원수는 갚아야 정의가 되고, 은혜를 모르는 사람을 인간답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원수를 갚기 위해 대립과 분열을 계속했고 편 가르기를 일삼아 왔다. 열린 사회, 공존의 질서와 의무는 찾아볼 길이 없었다. 동양적 전통 관념은 중요하다. 그러나 현재가 과거의 연장이라고 해서, 삶의 기준과 가치판단을 과거에서 찾는다면 그 사회와 국가는 더 좋은 미래를 창조하지 못한다. 어떤 개인을 존경하고 숭배하는 것도 그렇다. 그 사람과 같아지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의 인격과 사상을 받아들여 더 소망스러운 사회와 미래를 창조해 가야 한다. 현재는 미래를 위해 중요하지, 현재가 과거의 전통까지 역사의 소모품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창조적 진보는 모든 시대에 주어진 지도자의 의무와 사명이다.
그러나 더 시급한 문제가 있다. 옛날에는 주어진 사상과 가치관에 따라 주어진 과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성계를 대표하는 대학 사회가 존재했고, 가치관을 설정하는 종교사상도 있었다. 그러나 근대사회가 되면서는 예상 못 했던 현실이 인간적 생존의 과제로 예고 없이 찾아 들었다. 산업혁명도 그 하나의 실례였고, 마르크스 사상도 그런 문제 해결을 위해 태어났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도 인간을 예상 못 했던 방향으로 이끌어 갔다. 사회 문제는 더 복합적 과제를 제기했다. 메커니즘(기계론적 사고방식)의 개발과 발전은 우리의 사고와 정신적 기반은 물론 생존 가치를 뒤흔들어 놓았다. 핵 개발은 필요했다. 그러나 핵무기의 위협은 인류의 생존과 희망을 위협한다. 어리석은 정치가들은 “필요하면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라고 호언한다. 바꾸어 말하면 나와 우리의 정치 목적을 위해서는 인간의 생존 가능성 자체도 파멸시킬 수 있다는 망언이다. 악마를 대변하는 발상이다. 인공지능(AI)의 개발과 그 결과는 인간보다 유능한 기계 지능이 인간생존의 의미와 가치를 바꾸거나 주관할 수 있다는 현상이다. 우리의 사상과 가치관이 미치지 못하는 이런 현실이 계속 등장하고 있다. 인간은 이성과 사상, 양심과 도덕의 가치관을 갖고 살아왔는데 그 인간다움 마저 위협받고 있다. 우리도 인지하기 전에 누군가가 만든 새로운 현실이 계속 등장한다. 인간이 살던 집 문을 열고 보았더니 우리가 만든 기능 인간이 집을 차지하고 있는 괴리 현상이 되었다. 주인이었던 인간은 쫓겨나고 인간을 돕던 머슴이 주인 자리를 차지하게 된 현상이다.
진실과 선의 가치, 인간애로 완성해야 누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과학과 메커니즘의 기능을 창출해 낸 ‘인간다운 인간’이 집주인이 되어야 한다. 인간은 3000년 역사를 통해 세 가지 가치를 창조해 왔다. 정직과 진실, 양심의 자유에 따른 도덕과 선의 가치, 이 모두를 완성하는 인간애의 정신이다. 그런데 우리는 진실을 거부하는 불신, 사회악의 본성인 폭력, 악으로 악에 보복하는 역사적 죄악을 저지르고 있다. 인간 간의 믿음은 사라졌고 선의 가치와 창조력 상실은 역사의 희망을 빼앗아 버렸다. 이 모든 병폐를 해결할 수 있는 인간애의 위배(違背)와 포기는 인간존재의 원천을 소멸시킬 수 있다.
이런 인간다운 삶의 정신과 가치를 사회와 역사 안에서 재창출할 수 있는 희망을 주는 지도자가 ‘인간의 집’ 주인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만든 메커니즘적 기능은 집 밖 넓은 공간에서 인간다움을 돕는 보조 기능 가치로 필요할 뿐이다. 휴머니즘의 가치가 메커니즘 기능을 주관 지도할 수 있을 때 사회와 역사를 이끌어 갈 수 있고, 인간다운 삶을 완성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