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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정완 논설위원이 간다] 500억 소송 2심 판결 임박, 담배회사 책임 인정될까

중앙일보

2025.07.16 08:28 2025.07.16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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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간 이어진 담배 소송 결론은
질병관리청 흡연폐해실험실에서 연구원들이 흡연의 유해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주정완 기자
지난 4일 오후 충북 청주시 오송읍의 질병관리청 흡연폐해실험실. 담배 연기에서 나오는 각종 발암물질 등이 건강에 얼마나 나쁜 영향을 주는지 첨단 장비를 활용해 연구하는 현장이다. 2015년 문을 연 이곳은 세계보건기구(WHO) 기준에 맞춰 국제공인시험기관으로 인증을 받았다.

이 실험실의 고려은 책임연구원이 회전형 담배 연기 발생장치에 자동으로 궐련 담배를 끼운 뒤 불을 붙이는 장면을 시연했다. 담배를 피울 때 흡연자가 목으로 들이마시는 연기(주류연)만 따로 붙잡아서 모으는 장치다. 그는 “우리나라 흡연자들은 일반적으로 하루 10개비가량 담배를 피우는데 이번 실험에선 다섯 개비만 사용했다. 이 정도만 해도 흡연이 얼마나 유해한지 쉽게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외국보다 나쁜 한국인 흡연 습관
같은 양 피워도 유해물질 더 많아

흡연으로 암 발생 위험 커지지만
법원은 인과관계 인정에 소극적

5년 전 1심 재판 담배회사 승리
건보공단 “최신 연구로 뒤집겠다”

담배 유해성분을 모아둔 실험용기. [사진 질병관리청]
기계 장치가 한 바퀴 회전할 때마다 한 번씩 담배 연기를 빨아들이는 식으로 실험을 진행했다. 흡연으로 들이마시는 연기는 장치 내부로 연결된 관을 통해 종이필터로 모았다. 실험 전 새하얗던 종이필터는 실험 후 진한 갈색이 됐다. 담배 연기의 타르 성분이 필터의 색깔을 변하게 한 것이다. 고 책임연구원은 “타르는 몸 밖으로 배출이 안 된다. 오랜 기간 흡연한 사람이라면 폐가 시커멓게 변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타르 성분에 의해 짙은 갈색으로 변한 필터. [사진 질병관리청]
잠시 후 세포실험실로 자리를 옮겼다. 필터에 묻어나온 담배 연기 추출물을 용매로 녹여 묽게 만든 뒤 사람의 세포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곳이다. 고 책임연구원은 “담배 연기 추출물을 암세포에 주입한 뒤 현미경으로 관찰했다. 암세포가 혈관을 타고 몸속 다른 부분으로 전이하기 쉬운 모양으로 변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일반 세포는 쉽게 자연 소멸이 되기 때문에 암세포를 실험용으로 쓴다. 담배 연기로 암세포가 늘어나도 문제지만, 암세포가 줄어도 몸속에 염증과 활성산소를 유발하기 때문에 좋지 않다”고 지적했다.

직접흡연 사망자 연간 7만 명
질병청은 한국 흡연자들이 다른 나라보다 담배를 급하게 피우면서 연기를 더 깊이 들이마시는 습관을 지닌 점에 주목하고 있다. 안윤진 질병청 기후보건·건강위해대비과장은 “국제 기준으로 한 번 담배 연기를 흡입한 뒤 잠시 쉬었다가 다시 연기를 흡입하는 간격이 60초 정도인데 한국은 9초밖에 안 된다”며 “한 번 담배 연기를 빨아들일 때 용량을 보면 국제 기준은 35㎜인데 한국은 73㎜로 배 이상 많다”고 말했다. 그는 “같은 담배 한 개비를 피워도 한국인이 다른 나라 사람보다 훨씬 많은 유해 물질에 노출된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국민건강증진법 8조는 흡연이 건강에 해롭다는 사실을 교육·홍보하는 것을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의무로 규정한다. 1995년 김영삼 정부 때 처음 만들어진 법 조항이다. 이후 2006년 노무현 정부에선 간접흡연의 유해성도 함께 교육·홍보하도록 의무화했다. 이 조항에 근거해 질병청은 흡연의 유해성을 과학적으로 연구·분석하고 이런 사실을 적극적으로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질병청에 따르면 가장 최근 통계인 2022년 기준 직접흡연으로 인한 사망자는 7만2689명에 달했다. 한 해 전인 2021년과 비교하면 9263명(15%) 늘어난 수치다. 현재 담배를 피우는 사람의 사망 위험을 비흡연자와 비교하면 남성의 경우 1.7배, 여성의 경우 1.8배 높았다.

2022년 기준 직접흡연으로 인한 사회·경제적 손실액은 13조6316억원으로 전년보다 6562억원(5%) 증가했다. 흡연자의 병원 진료에 들어가는 의료·간병비 등 직접 비용과 생산성 손실 등 간접 비용을 합산한 금액이다. 그중에선 조기 사망에 의한 생산성 손실이 절반이 넘는 비중(52.5%)을 차지했다. 만일 흡연으로 인한 사망자들이 일찍 담배를 끊고 건강하게 살았다면 연간 7조원 이상의 경제적 가치를 추가로 만들어낼 수 있었다는 뜻이다.

재판 쟁점은 흡연과 암의 인과관계
담배가 흡연자의 사망 위험을 높이고 사회·경제적으로 막대한 비용을 초래한다는 정부 발표에도 담배회사들은 법적으로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다. 담배는 개인의 선호도에 따라 선택하는 기호품이며 흡연자에게 충분한 의지가 있다면 담배를 끊을 수도 있다는 게 담배회사들의 논리다. 담배회사의 법적 책임과 관련해 사회적으로 주목할 만한 법원 판결이 조만간 나온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이 담배회사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 대한 서울고등법원의 항소심 판결이다.

건보공단은 2014년 KT&G·한국필립모리스·BAT코리아 등 담배회사 세 곳을 상대로 533억원을 달라는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 장기간 담배를 피웠다가 암에 걸린 환자들에게 건보공단이 지급한 보험금의 일부를 담배회사들이 물어내라는 소송이다. 건보공단의 소송 제기 6년 만인 2020년 서울중앙지법의 1심 판결에선 담배회사들이 이겼다. 그러자 건보공단은 서울고법에 항소장을 제출했고 그 후 5년째 2심 재판이 진행 중이다. 재판부는 지난 5월 담배 소송 항소심의 최종 변론을 진행했고 조만간 선고기일을 지정할 전망이다.

이번 소송의 가장 큰 쟁점은 흡연과 암 발생의 직접적인 인과 관계를 법원이 인정하느냐다. 장기간 담배를 피우면 통계적으로 암 발생 위험이 커진다는 상관관계는 법원도 인정한다. 다만 특정한 개인이 암에 걸렸을 때 흡연이 암의 직접적인 원인이 맞는지 입증하는 건 쉽지 않다. 예컨대 흡연자 A씨가 암에 걸렸다면 그 원인이 흡연일 수도 있지만, 다른 유해한 환경에 노출됐거나 유전적 요인으로 인해 암에 걸렸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소세포 폐암, 흡연 외 다른 원인 없어”
흡연과 암 발생의 인과 관계를 입증하기 위한 건보공단의 핵심 전략은 빅데이터다. 건보공단은 국내 병·의원의 방대한 진료 기록이란 빅데이터를 활용해 승소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 암 환자 3465명을 뽑아냈다. 이들은 하루 평균 한 갑을 기준으로 20년 이상 담배를 피웠으면서 폐암(편평세포암·소세포암)이나 후두암(편평세포암)으로 진단을 받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전에 대법원은 흡연과 일부 폐암·후두암에 대해 역학적 인과 관계가 있다고 인정한 판례가 있다. 다만 특정한 개인의 암 발생과 흡연의 직접적인 인과 관계는 인정하지 않았다. 이번 담배 소송의 1심 재판부도 “원고(건보공단)가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피고들(담배회사들)이 수입·제조·판매한 담배의 흡연과 이 사건 질병의 발생 사이에 인과 관계를 인정하기에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건보공단은 항소심에선 흡연과 암 발생에 대한 새로운 연구 자료 제출로 1심 판결을 뒤집을 수 있다고 기대한다. 건보공단 부설 연구기관인 건강보험연구원과 연세대 보건대학원의 공동 연구에 따르면 이번 담배 소송의 대상인 소세포 폐암에 흡연이 기여하는 정도는 98.2%로 나타났다. 반면에 유전 요인에선 과학적으로 유의미한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따라서 흡연이 아니면 소세포 폐암에 걸리지 않았을 것이란 게 건보공단의 설명이다.

이번 연구에서 편평세포 후두암에 흡연이 기여하는 정도는 88%, 편평세포 폐암에는 86.2%로 분석됐다. 정기석 건보공단 이사장은 지난 5월 기자회견에서 “1심 재판에서 원했던, 담배를 피운 사람과 안 피운 사람의 폐암 발병 위험을 새로 연구해서 14만 명을 대상으로 한 자료를 가져왔다. 공정한 재판이 이뤄진다면 이번에는 새로운 판결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국내 개인 담배 소송은 흡연자 패소…미국은 내부 고발로 천문학적 배상
한국금연운동협의회가 지난 5월 22일 담배 소송 지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스1]
국내에서 첫 담배 소송은 2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건보공단 소송과의 차이점은 흡연자 개인이 국가와 담배회사(KT&G)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는 것이다. 1999년 9월 외항선원 출신으로 56세였던 김모씨는 36년간 흡연으로 폐암에 걸렸다며 1억7600만원을 달라는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석 달 뒤에는 한국금연운동협의회가 주도해 흡연자 여섯 명이 공동으로 3억원을 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두 건의 소송은 1심 재판부터 대법원 확정판결까지 15년간 이어졌지만 결국 흡연자의 패소로 마무리됐다.

2012년에는 박재갑 국립중앙의료원장 등이 담배 판매를 허용한 담배사업법은 위헌이라며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내기도 했다. 하지만 헌재는 담배의 제조·판매와 담배에 대한 규제가 모두 합헌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헌재는 결정문에서 “담배의 제조 및 판매 자체를 금지해야 한다고 보기는 어렵다”면서도 “담배사업법은 담배의 유해성으로부터 국민의 생명·신체를 보호하고자 일련의 장치들을 두고 있다”고 설명했다.

미국에선 1998년 46개 주 정부와 워싱턴DC 법무장관들이 4대 주요 담배회사들과 25년간 2060억 달러(약 290조원)의 배상금을 받기로 합의한 사건이 유명하다. 담배회사들이 흡연의 유해성과 중독성에 대한 정보를 알면서도 숨기고 소비자를 속여 왔다는 사실이 내부 고발자들에 의해 밝혀졌기 때문이다.

아직 국내 소송에선 담배회사들이 패소하거나 배상금을 물어낸 사례는 없다. 그렇다고 담배 소송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다. 한국금연운동협의회는 ‘담배 소송은 그 진행 과정에서 담배 규제 정책의 수립과 성공에 기여할 수 있다’고 평가한다.
주정완 논설위원




주정완([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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