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17일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 회계’ 의혹 등 상고심에서 무죄를 확정 받았다. 2016년 국정농단 사건 이후 8년 넘게 묶여있던 ‘사법족쇄’에서 완전히 풀려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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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의 족쇄…‘삼성위기론’ 현실 됐다
대법원 3부(주심 오석준 대법관)는 17일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및 삼성바이오 회계 처리와 관련한 이 회장의 상고심에서 원심 무죄 판결을 그대로 확정했다. 이 회장측 변호인단은 “삼성물산 합병과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처리가 적법하다는 점이 분명히 확인됐다”며 “5년에 걸친 충실한 심리를 통해 현명하게 판단하여 주신 법원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했다. 삼성전자는 별도 입장을 내지 않았다.
이 회장은 이번 재판을 포함해 총 113차례 열렸던 공판 중 102차례(90.2%) 법정에 직접 출석했다. 국정농단 의혹 사건을 포함하면 약 9년째 이어진 사법 절차였다. 삼성 관계자는 “대통령 해외 순방 동행 등 절대 불가피한 사정을 빼고는 모두 출석했다”고 했다. 하지만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이 회장의 글로벌 네트워크가 위축되고 국제 평판이 하락한 측면이 있다는 것이 조직 내외부의 평가다.
실제로 이 회장은 2016년 당시 트럼프 당선인이 주최한 기업 대표 간담회에 유일하게 초청된 해외 기업인이었지만, 국정농단 수사 때문에 결국 불참한 바 있다.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전세계적으로 재벌 총수를 8년 넘게 사법리스크에 시달리게 하는 나라는 우리나라 뿐”이라며 “거의 모든 회계학자들이 정당하다고 평가하는 일을 무리하게 추진했다”고 한탄했다.
총수가 사법리스크에 발이 묶인 가운데 ‘1등’을 자랑하던 반도체 사업은 스텝이 꼬였다. 우선 인공지능(AI) 경쟁에서 필수적인 칩인 HBM 대응이 늦은 바람에 메모리 반도체 ‘절대 강자’의 자리를 SK하이닉스에 내줬다. 올 1분기 D램 시잠 점유율은 SK하이닉스가 삼성전자를 제쳤다. 한때 대만의 TSMC를 무섭게 따라잡았던 파운드리(위탁생산) 역시 휘청거리고 있다. 올 1분기 세계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에서 TSMC는 67.6%를 차지했지만, 삼성전자는 7.7%에 머물렀다. 스마트폰과 가전 시장에선 각각 애플과 LG전자 등 전통 강자와 값싼 중국 제조사의 공격 사이에 낀 ‘샌드위치’ 신세가 됐다. 업계에서는 “무엇보다 AI라는 파도에 삼성전자가 올라타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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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 무죄, 리더십 복원의 신호탄 될까
이번 판결로 사법리스크가 해소되면서 ‘이재용 리더십’이 삼성 조직 전반에 새바람을 불어넣을 것이란 기대가 나온다. 미래 성장동력 확보를 위한 대형 인수합병(M&A)이 첫 번째 과제로 꼽힌다. 실제로 한동안 중단됐던 M&A는 이 회장은 2심 무죄를 선고받은 올해 들어서만 세 차례 이뤄졌다. 올해 5월엔 하만을 통해 미국 마시모 오디오 사업부를 3억5000만달러(약 5000억원)에 인수했고, 같은 달 독일 냉난방 공조 기업 플랙트그룹을 15억유로(약 2조4000억원)에 사들였다. 최근에는 미국 디지털 헬스케어 회사인 ‘젤스’도 도 인수했다.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기술”이라 외치던 이 회장이 강조하던 ‘기술경영’도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20년 된 이 회장의 공부모임인 ‘미래기술연구회’가 3년 만에 재정비해 지난 2월 새출발했다. 글로벌 행보도 본격화했다. 이 회장은 지난 9일부터 13일까지 “1년 중 가장 바쁜 출장이고 가장 신경 쓰는 출장”이라고 말한 글로벌 재계 거물들의 비공개 사교 모임 선밸리 콘퍼런스에 참석했다. 2심 무죄 선고 직후인 지난 2월 4일에는 샘 올트먼 오픈AI 최고경영자(CEO), 손정의(일본명 손 마사요시) 소프트뱅크 회장을 만나 인공지능(AI) 투자를 논의했다.
가라앉은 조직 분위기를 되살리기 위해 임직원 대상으로 공개 메시지를 낼 수 있다는 가능성도 나온다. 실제로 이 회장은 2심 무죄 선고 이후인 지난 3월 그간의 조용한 행보를 깨고 “‘사즉생(死卽生·죽기로 마음먹으면 산다는 뜻)’의 각오”를 주문한 바 있다. 국정농단 의혹 이후 해체된 ‘미래전략실’의 역할을 할 새로운 컨트롤타워의 필요성도 대두된다. 현재 삼성은 삼성전자 사업지원TF 등 주력 계열사에 옛 미래전략실 일부 기능을 갖춘 조직을 운영하고 있지만 관리 기능에 그쳐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작년 말 삼성글로벌리서치에 옛 삼성그룹 감사실 역할을 하는 ‘경영진단실’을 만든 뒤 올해 2명(대통령비서실 별정직고위공무원·외교부 특임공관장)의 고위공무원이 삼성글로벌리서치로 적을 옮기기도 했다.
삼성전자 반도체 신화를 이끈 진대제 전 정보통신부 장관(전 삼성전자 사장)은 “총수가 사법 리스크에 정신을 빼앗기니 위기가 닥칠 수밖에 없었다”고 짚었다. 이어 그는 “과거 이건희 회장 시절의 위기 때는 회장이 직접 밤낮을 불시에 가리지 않고 경영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임원들은 늘 긴장하며 일했고, 이런 긴장감이 조직 전체를 지탱했다”며 “‘긴장감을 되살리는 총수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삼성웨이』를 쓴 이경묵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는 “총수가 재판에 발이 묶이면서 외부로부터 비난받거나 시비 삼을 거리를 하지 말자는 문화가 생기면서 ‘사즉생’ 문화가 깨졌다”며 “위기의식을 바탕으로 치열하게 일하는 문화를 복원하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지적했다.
이날 판결에 대해 재계는 “기업의 경영 리스크 해소 뿐만 아니라 한국 경제 전반에 긍정적인 파급 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된다”(대한상의), “강력한 리더십을 중심으로 보다 세계 시장에서 우위를 확보하길 바란다”(경총) 등 잇따라 환영 메시지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