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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효의 섭리처럼…흐느적거리는 블루스에 맞춰 막걸리가 익어간다

중앙일보

2025.07.16 20:00 2025.07.17 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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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두 개인전 '불가피한 상황과 피치 못할 사정들' 전시장 입구. 장독대에서 막걸리가 익어가고, 블루스 연주 영상이 흐른다. 사진 국제갤러리 부산

전시장 입구에 놓인 항아리에서 우윳빛 막걸리가 기포를 터뜨리며 발효되고, 스크린 속 실물 크기 인물들은 흐느적흐느적 블루스를 연주한다. 부산 수영구 국제갤러리 부산에서 열리는 정연두(56) 개인전 ‘불가피한 상황과 피치 못할 사정들’이다.
정연두는 “예술은 무관해 보이는 것들 사이에서 거리감을 메우는 일"이라고 말했다. 사진 국제갤러리 부산

작가는 67bpm의 느린 속도와 간단한 코드만 주고 드럼ㆍ콘트라베이스 주자들이 제각각 연주한 영상을 한곳에 모아 협연으로 조율했다. 개별 연주자들의 콘트라베이스ㆍ색소폰ㆍ오르간 소리는 전시장에서 합쳐져 공명하게 됐다. 19세기 중반 미국 남부 흑인들이 힘겨운 현실을 특유의 리듬과 가사로 풀어낸 이 장르에서 정연두는 설명되지 않는 상황과 피치 못할 난관을 통과하는 자조적이면서도 유쾌한 상상의 방식을 발견했다.
영상 '피치 못할 사정들'의 스틸 이미지. 사진 국제갤러리 부산

이 느릿한 가락에 입힌 보컬리스트의 노래는 한국에 정착한 고려인들의 사연. 개개인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역사적ㆍ정치적 상황에 따라 구소련 지역으로 강제 이주돼 살아온 고려인 후세대들의 인터뷰로 쓴 가사다. 전시장 벽에는 고려인 청소년들을 담은 영상 '피치 못할 사정들'이 흐른다. “한국 겨울이 아름다워. BTS, 블랙핑크, 하지만 난 될 수 없어. 한국인이 될 수 없어” 같은 속내를 러시아어로 천연 염색한 천을 들고 있다.
정연두, 바실러스 초상 #5, 2025, 잉크젯 피그먼트 프린트. 사진 국제갤러리 부산

메주를 근접 촬영한 '바실러스의 초상'(2025)을 함께 걸었다. 메주콩이 바실러스균과 만나 발효돼 피어오른 하얀 거품이 삐뚤빼뚤한 얼굴처럼 보인다. 작가는 쌀이 누룩의 균과 만나 이뤄지는 발효의 섭리가 요리라기보다는 간절히 바랄 수밖에 없는 신의 영역에 가깝다고 여겼다. 발효의 흔적에서 우리와 닮은 모습을 찾아내 다름과 닮음이 공존하는 경이로운 자연의 섭리를 친근하고도 익살맞게 전환했다. 20일까지, 무료.



권근영([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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