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자축구가 20년 만에 동아시아축구연맹(EAFF) E-1 챔피언십(동아시안컵) 챔피언을 탈환한 지난 16일 용인미르스타디움. 한국 여자 축구대표팀의 베테랑 미드필더 지소연(34·시애틀)은 이마에 맺힌 땀과 빗물을 닦아내며 이렇게 말했다. 지소연은 이날 폭우 속에 치러진 대만과의 대회 최종 3차전에서 선발 출전해 그라운드를 쉴 새 없이 누볐다. 0-0으로 맞선 후반 25분엔 페널티킥 결승골을 터뜨렸다.
한국은 지소연의 활약에 힘입어 대만을 2-0으로 꺾었다. 한국은 1승2무(승점 5)로 일본·중국과 같았지만, 승점 같은 팀끼리 승점-골 득실-다득점 순으로 순위를 가리는 대회 규정에 따라 우승 트로피를 들었다. 한·중·일은 각각 맞대결에서 모두 무승부를 기록했는데 한국이 3골(일본전 2-2, 중국전 1-1)로 가장 득점이 많았다. 한국은 여자부 대회가 처음 열렸던 2005년에 우승한 이후 한 번도 우승하지 못했다.
지소연은 태극마크를 달고 20년 만에 생애 첫 우승 트로피를 드는 감격도 누렸다. 한국 축구의 레전드이자 세계적인 공격형 미드필더 지소연은 첼시(잉글랜드), 고베(일본) 등 클럽팀에선 숱한 우승을 경험했다. 그러나 대표팀에선 2006년 데뷔 이후 20년 가까이 A매치 169경기를 뛰면서 한 번도 우승 못했다. 마침내 '우승 한'을 푼 지소연은 "이 순간을 굉장히 기다려왔다. 대표팀 20년차에 우승컵을 들어 올렸는데, 지난 시간이 헛되지 않았다"며 기뻐했다.
여자대표팀은 이번 대회에서 엔트리 26명 중 14명을 2000년대생으로 채워 세대교체를 시도했다. 평소 묵묵히 뒤에서 밀어주는 스타일의 지소연은 이번 만큼은 리더를 맡아 후배들을 이끌었다. 특히 승부처였던 대만전에선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의 카리스마를 발휘했다. 지소연은 "전반전을 0-0으로 비기고 하프타임에 라커룸에서 소리를 질렀다. 이대로 (무승부로) 가면 우승 못 한다고, 정신 차리라고 했다. 저를 처음 겪는 어린 선수들이 굉장히 놀랐다"고 전했다. 해결사 역할도 그의 몫이었다.
지소연은 "원래 안 차고 싶었다. 자신 있는 사람 나와 보라니까 아무도 대답을 안 하더라"라며 페널티킥 키커로 나서게 된 배경을 전했다. 주장 이금민(31·버밍엄시티)과 대표팀 후배들은 우승 세리머니 때 지소연에게 한가운데 자리를 양보했다. 지소연은 "소속팀에서는 항상 우승을 많이 했는데, 대표팀에서는 한 번도 우승한 적이 없어서 정말 감격스러웠다. 앞으로 자주 이런 모습들을 보면 좋겠다"며 활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