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자 생활 30년 만에 근속휴가를 얻었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에서 한달살기를 계획했다. 20년 전 연수차 1년간 머물렀던 곳이다. 항공권을 끊고 호텔과 렌터카를 예약했는데 전자여행허가(ESTA)에서 제동이 걸렸다. 이메일로, 전화로 문의해봐도 그저 “기다리라”는 답뿐이다. 열흘이 지나서야 ‘승인 취소(authorization canceled)’ 안내가 뜬다.
#2. 부랴부랴 비자 인터뷰 일정을 잡았다. 185달러를 내란다. 그나마 가장 빠른 일정이 비행기가 뜨기 일주일 전이다. 꼬박 세시간 줄을 선 끝에 영사를 만났다. 아니, 아무 은행이나 가도 있는 번호표 기계 하나 놓으면 안 되나. 하다못해 식당에 가도 휴대전화로 순서를 알려주는 세상인데. 미국 정부는 가장 친미적인 사람들까지 반미주의자로 만드는 신기한 재주가 있다. 인터뷰는 자체는 부드럽게 진행됐다. 2016년 이란 방문이 문제였다. 정부 초청 프로그램으로 취재차 방문했다는 설명하자 3분 만에 비자 승인이 났다. 배송에 시간이 걸려 출국 전날에야 10년짜리 비자가 붙은 여권을 받을 수 있었다.
유럽·중동 전쟁, 관세 갈등 남일
매일 치열하게 사는 한국인 눈엔
기묘하게 평화로운 일상 이어져
#3. 노스캐롤라이나는 면적이 14만㎢로 대한민국의 1.4배인데 인구는 1100만명이다. 140만명이 모여 사는 주도 랄리에서 동쪽으로 3시간을 달리면 대서양이, 서쪽으로 3시간을 달리면 산맥이 나온다. 그 사이는 모두 평지다. 도시에서 30분만 벗어나면 지평선까지 펼쳐진 옥수수밭 아니면 어두컴컴한 숲뿐이다. 우리나라 사람 5000만명이 모두 이주해도 별로 티가 나지 않을 것 같은 축복받은 땅이다. 물가 싸고, 치안 좋고, 의료 괜찮아서 미국인들이 은퇴 후 살기 좋은 곳으로 손꼽는 동네다.
#4. 우리나라의 1인당 소득이 1만5000달러이던 2004년 미국은 4만 달러였다. 하지만 실제 생활비는 크게 부담되지 않았다. 수퍼마켓에는 값싼 고기와 과일이 널려 있고, 자동차와 가전제품 가격도 훨씬 저렴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의 1인당 소득은 3만6000달러, 미국은 8만6000달러다. 격차는 여전하지만 체감 물가는 완전히 달라졌다. 20년 전 월세 800달러던 아파트는 2000달러로 올랐다. 갤런(3.8L) 당 1달러이던 휘발유는 이젠 3달러다. 파이브가이스에서 햄버거와 음료 두 개씩 주문하니 25달러다. 그나마 뉴욕이나 캘리포니아보다는 싼 편이란다. 예전에는 외식만 하지 않으면 생활비가 확실히 적게 들었는데 이번에 장을 보니 고기·채소·과일 가격이 모두 올랐다. 코로나 이후 물가가 확 뛴 데다 최근 트럼프 정부가 무차별적인 관세 전쟁에 나서면서 더 오르면 오르지 내릴 것 같지는 않다.
#5. 미국인들이 독립기념일 축제를 벌이는 사이 벌어진 기습 폭우로 텍사스에서 300명 이상이 숨지거나 실종됐다. 미국 언론들은 “기상청(NWS)·연방재난관리청(FEMA) 등의 인력을 감축한 결과 사전 경고와 피해 대응이 늦어졌다”며 연일 트럼프 책임론을 부각했다. 전통적인 공화당 강세 지역이었던 노스캐롤라이나는 최근 대선의 승패를 가르는 대표적인 경합주로 떠올랐다. 선거 때마다 1~2% 차이로 승패가 갈린다. 하지만 느긋한 남부 백인들은 트럼프 때리기에 별 관심이 없는지, 머나먼 동양에서 온 이방인 앞에서는 티를 내지 않는 것인지 미소를 지으며 날씨 얘기만 한다. 기본적으로 재난은 카운티와 주 정부의 책임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6. 요즘 CNN을 틀어놓으면 절반 이상이 트럼프 얘기다. 텍사스 폭우 뉴스가 지나가자 ‘엡스타인’이 이어진다. 2019년 수감 중 스스로 목숨을 끊은 억만장자 제프리 엡스타인을 두고 트럼프는 “민주당 거물들이 성접대를 숨기려 살해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지난주 “음모론은 사실이 아니다”고 입장을 바꿔 극성 지지자인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 그룹의 반발을 샀다. 최근에는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에게 무기를 제공하며 “모스크바를 폭격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는 속보가 나왔다. 백악관은 “모스크바 공격은 안된다는 의미”라고 해명했다. 가벼운 대통령의 입 때문에 상황이 어디로 튈지 아무도 모른다.
#7. 모든 것이 풍요로운 이 나라에도 여전히 비데는 없다. 그리고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커피는 정말 맛이 없다. 여전히 미국 시골은 따가운 햇볕 아래 평화롭기만 하다. 유럽과 중동에서 이어지는 전쟁, 연일 이어지는 관세 갈등은 남의 일이다.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사는 한국인의 눈에는 기묘하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풍경이다. 10대에서 40대까지 남자들이 죄다 죽어 나가는데 ‘서부 전선 이상 없다’는 보고서 한 줄로 끝난 레마르크의 소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