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말도 마유. 밤새 한숨도 못 자고 대피하라는 안내방송 듣고 이것저것 짐을 싸는데 바로 집 마당까지 물이 잠겼어유.” 17일 오후 충남 예산군 삽교읍 하포1리에서 만난 주민 박은순(여·74)씨는 긴박했던 새벽 상황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하포1리 주민들은 17일 오전 6시쯤 “대피하라”는 마을 방송을 듣고 밖으로 나와 상황을 살폈지만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불과 한 시간도 되지 않은 7시부터 마을이 침수되면서 마을회관과 제방으로 대피했다. 마을회관도 금세 물에 잠겨 주민 10여 명은 옥상으로 올라가 구조를 기다렸다. 20여 명은 높은 제방(삽교천)에서 구조를 요청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119구조대는 고무보트를 투입했다. 공중에는 드론을 띄워 구조를 기다리는 주민의 위치를 파악했다. 하포1리 주민들은 인근 교량 공사 현장에서 둑이 무너지면서 마을이 침수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예산군 오가면 신원1리는 인근 무한천이 범람하면서 마을 전체가 물에 잠겼다. 비닐하우스 70여 동은 꼭대기만 남았고, 주택도 대부분 물에 잠겼다. 주민들은 “갑자기 재난문자가 들어오더니 (예당호 물을) 방류한다고 하더라. 아래쪽이 이미 물이 가득한데 저수지 물을 한꺼번에 내려보내니 감당이 안 된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이유로 이번 침수가 ‘인재(人災)’라고 했다.
기록적인 폭우로 충청과 수도권을 중심으로 전국 각지에서 인명·재산 피해가 발생한 가운데 비구름이 영호남 지역으로 확산하면서 피해 규모가 더 커질 것으로 우려된다. 17일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에 따르면 이번 호우로 이날 오후 6시 기준 4명이 숨지고 421세대 1382명이 일시 대피했다. 중대본은 이날 풍수해 위기경보를 최고 수준인 3단계 ‘심각’으로 올렸다.
충남 서산에선 10시간 만에 440㎜에 달하는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졌다. 1968년 기상 관측을 시작한 이후 최고치다. 이날 충남에는 667개 학교에서 휴업·단축수업·원격수업 등 학사일정을 조정했다.
대구시 북구 노곡동 일대는 오후에 갑자기 내린 많은 비로 주택들과 도로가 침수됐다. 소방당국은 구명보트 등 장비 14대와 인력 68명을 투입해 주민 26명을 대피시켰다. 금호강변에 위치한 노곡동은 2010년 7월에도 두 차례 침수를 당하는 등 상습 침수지역으로 꼽힌다.
많은 비에 지반이 약해지면서 도로·철길이 끊기고 비행기 운항도 차질을 빚었다. 대전당진고속도로 면천IC 부근이 한때 전면 통제됐고, 서해안고속도로 서울 방향 해미IC~서산IC 구간도 한때 통행이 차단됐다.
정부는 비가 많이 내린 지역의 경우 지자체장의 대피명령 권한 행사를 권고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이날 “지하차도, 하천범람 지역, 산사태 위험지역 등 인명피해 우려 지역에 대한 안전점검, 대응에 만전을 기해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18일 예정된 부산 타운홀 미팅을 취소하고 피해 상황을 점검한다.
한편 지난 16일 고가도로 옹벽이 무너지면서 40대 남성이 숨진 사건과 관련, 경기남부경찰청은 사고 며칠 전부터 붕괴위험 신고가 접수된 사실을 파악하고 인재 여부에 대한 수사에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