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닫기

깨진 변기와 폐타이어, 10분 만에 '멸종위기' 점박이물범으로 부활[스튜디오486]

중앙일보

2025.07.18 15:00

  • 글자크기
  • 인쇄
  • 공유
기사 공유
" [스튜디오486]은 중앙일보 사진부 기자들이 발로 뛰어 만든 포토스토리를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중앙일보는 상암산로 48-6에 있습니다. "


쓰레기를 보면 눈을 반짝이는 사람들이 있다.
전국의 산과 들을 누비며 쓰레기를 줍고, 수거한 쓰레기를 '정크 아트(Junk Art, 버려진 폐품이나 잡동사니를 활용해 예술 작품을 만드는 것)’로 재창조하는 사람들, 바로 클린하이커스(Clean Hikers)다.
클린하이커스 회원들이 지난 12일 인천광역시 옹진군 영흥면 선재도 해안에서 주운 쓰레기로 바위 위에 앉은 서해 점박이물범 정크아트를 만들었다. 김성룡 기자
지난 12일 인천광역시 옹진군 영흥면 선재도에 10명의 클린하이커스가 모였다. 오늘은 본격적인 여름 휴가철을 앞두고 산이 아닌 해변의 쓰레기를 줍는 '비치 클린'을 할 예정이다. 집결 시간이 되자 한 손엔 집게, 다른 한 손엔 자루를 든 참가자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클린하이커스 창립자이자 리더인 김강은씨(35)의 간단한 작업 설명 뒤 바닷가로 내려간 이들은 순식간에 흩어져 일사불란하게 쓰레기를 주워 준비한 자루에 담았다. 현장에 일찍 도착해 훑어봤을 때 쓰레기가 많지 않아 보였는데 이들의 자루는 순식간에 채워지고 있었다. 역시 전문가(?) 다웠다.
낚시꾼들이 버리고 간 것으로 추정되는 쓰레기들을 줍고 있다. 김성룡 기자
쓰레기 줍기가 시작되자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포대자루가 채워졌다. 김성룡 기자
해변에서 전기 모기 채를 주운 한 참가자는 전리품을 자랑하듯 카메라를 향해 포즈를 취했다. 이들은 의외의 장소에서 의외의 쓰레기를 주울 때 마치 유물을 발굴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했다. 이쯤 되면 쓰레기를 줍는 건지, 보물찾기를 하는 건지 헷갈릴 정도다. 이들에게 쓰레기 줍기란 봉사활동이 아닌 '놀이'였다.
클린하이커스 리더인 김강은씨(오른쪽 사진) 등 참가자들이 특이한 쓰레기를 주워 들고 즐거워하고 있다. 김성룡 기자
깨진 병 조각들을 조개 껍질에 담아 치우고 있다. 김성룡 기자
그늘 하나 없는 해변이라 모자와 팔토시로 햇볕을 가리며 쓰레기를 줍고 있다. 김성룡 기자
뜨거운 태양을 피할 그늘조차 없는 해변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주워 담은 쓰레기들이 어느새 자루를 가득 채웠다. 이제 수거한 쓰레기로 정크 아트 작품을 만들 차례. 어떤 작품을 만들지 참가자들의 아이디어 회의가 시작됐다.
"흰색 도기들이 많은 걸 활용하면 좋겠다"
"이 지역에 사는 깃대종(유엔환경계획이 만든 개념으로서, 특정 지역의 생태계를 대표할 수 있는 주요 동·식물을 뜻함)이 뭐지?"
"백령도에서 근무할 때 본 점박이물범은 어때?"
참가자들이 저마다 스마트폰으로 점박이물범의 사진을 검색해 서로 보여주며 의견을 주고받았다.
이곳 해변에선 깨진 변기와 도자기 등의 파편이 많이 수거됐다. 김성룡 기자
특이한 쓰레기를 주우면 사진으로 기록해두기도 한다. 김성룡 기자
점박이물범은 귀여운 외모를 지니고 있지만, 기후변화와 환경오염 등으로 서식지가 줄어들면서 멸종위기를 겪고 있다. 현재 서해 백령도 인근에 300여 마리가 서식하고 있으며, 최근 서산 가로림만에서도 소수 개체가 서식하는 게 확인됐다. 사람을 피해 백령도로 떠난 점박이물범이 다시 선재도 앞바다로 돌아오기를 바라며 정크 아트로 점박이물범을 만들기로 했다.

김강은씨가 모래사장에 밑그림을 그린 뒤 각 부위에 어울리는 쓰레기들을 채워 넣었다. 시작한지 불과 십 여분 만에 바위에 앉은 모습의 점박이물범이 완성됐다. 해양 깃대종인 점박이물범은 천연기념물 331호이자 해양수산부 해양보호생물, 환경부 멸종위기 1급 야생생물이다.
서해 점박이물범의 얼굴을 꾸미고 있다. 김성룡 기자
정크 아트를 만들고 남은 쓰레기를 정리하고 있다. 김성룡 기자
곧 사라질 서해 점박이물범 정크 아트 작품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김성룡 기자
정크 아트로 만든 점박이물범과 단체 사진 촬영까지 마친 이들은 쓰레기를 다시 자루에 담은 뒤 하나하나 무게를 쟀다. 이날 수거한 쓰레기 무게는 약 140㎏이었다. 이렇게 수거한 쓰레기들은 정크 아트 작품 제작을 위한 선별 과정을 거친 뒤, 재활용품은 분리 배출, 일반쓰레기는 지역 폐기물 배출 장소에 처리하고, 일부 대형 폐기물 등은 국민신문고를 통해 수거 요청을 한다.

충북 음성에서 출발해 행사에 참여한 심현보씨(44)는 "백패킹을 하면서 '흔적 남기지 않기 (Leave No Trace, 야외 활동 시 쓰레기를 남기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려는 윤리)'에 관해 알게 되었고, 쓰레기를 버리지 않는 것을 넘어 쓰레기를 줍는 활동까지 하게 됐다"고 클린하이커스 참가 배경을 밝혔다.
김강은씨가 이날 수거한 쓰레기들의 무게를 측정하고 있다. 김성룡 기자
이날 처음 모임에 나온 김응도씨(29)는 "직업이 환경관리직이라 평소 재활용 등 폐기물을 수거하고 있다"며 "클린하이커스 활동은 일로 쓰레기를 수거하는 것과는 또 다른 재미가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가입해 2년째 꾸준히 모임에 참여하고 있는 김혜진씨(43)는 "오래되고 특이한 쓰레기를 주우면 마치 유물을 발굴한 듯한 기분이 들고, 이렇게 모은 쓰레기로 정크 아트를 만드는 것도 재미있어서 꾸준히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지리산에서 발굴한 1970~80년대 유물급 쓰레기들. 사진 클린하이커스
클린하이커스는 2018년 시작된 시민 주도 환경운동단체다. 이들은 등산과 '플로깅(Plogging, '줍다'는 뜻의 스웨덴어 플로카 우프(Plocka Upp)와 영어단어 조깅(jogging)의 합성어)'을 결합해, 산에 오르며 쓰레기를 줍는 독특한 방식으로 환경 운동을 벌이고 있다. 시작은 지리산 산행 중 대피소에 쌓인 쓰레기 더미를 보며 충격을 받은 김강은씨가 하산을 하며 주운 쓰레기 사진을 SNS에 공유한 것이 발단이 됐다. 이 게시물이 기대 이상의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면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함께 쓰레기를 줍기 시작했다. 지난 7년 동안 총 1만321명이 클린하이커스 활동에 참여해 전국의 산과 바다를 누비며 환경 지킴이 활동을 해오고 있다. 이들이 7년간 수거한 쓰레기 무게는 총 8.2t에 달한다.
클린하이커스가 수거한 쓰레기도 만든 정크 아트 작품들. 왼쪽 위 사진부터 시계방향으로 마이산의 말. 청계산(호랑이 해), 신안의 낙지, 쓰레기로 가득 찬 텐트를 주제로 만들었다. 사진 클린하이커스
이들은 쓰레기를 수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쓰레기를 재료로 정크 아트 작품을 만들어 SNS에 공유하고,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 환경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정크 아트는 어렵고 진지해야 할 것 같은 환경에 대한 심리적 장벽을 낮추고, 재밌고 즐거운 것으로 다가가게 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이날 선재도에서 주운 쓰레기는 정크 아트 작품으로 만들어져 오는 22일부터 약 5개월간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경기해양안전체험관에서 '쓰레기몬스터의 탄생 – 해양몬스터편'이라는 제목으로 전시될 예정이다.
선재도 쓰레기 줍기를 마친 뒤 서해 점박이물범 정크아트와 기념촬영을 하는 클린하이커스. 김성룡 기자
김강은씨는 클린하이커스의 미래에 관해 "지금처럼 산과 들을 다니며 쓰레기 줍기를 계속하면서 정크 아트를 통한 환경 보호 메시지를 전파할 것"이라며 "환경, 예술, 놀이, 탐험이 결합한 오프라인 콘텐트를 기반으로 누구나 즐겁게 환경을 실천하며 자기 삶의 방향성을 발견할 수 있는 지속가능한 아웃도어 문화 콘텐트를 만들어가려 한다"고 밝혔다.





▶[스튜디오486]45도 바윗길? 그냥 넘는다… 英재벌이 만든 진짜 SUV
▶[스튜디오486]“좋은 누룩은 좋은 술의 씨앗”...300번 실패 끝에 빚은 청명주
▶[스튜디오486] 다른 기사 더보기

김성룡([email protected])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