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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여 없는데 10대1 경쟁률…'K원전 축하' 자리까지 뜬 이들 정체

중앙일보

2025.07.19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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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재의 스포츠 인사이드] 태권도 세계화 첨병 ‘WT 시범단’
지난 6월 21일 체코 프라하의 바츨라프 광장에서 세계태권도연맹 시범단이 ‘오징어 게임’을 테마로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다. [사진 세계태권도연맹]
챗GPT에게 “태권도 세계화 전략에 대해 알려주세요”라고 공손하게 질문했다. 그는 일곱 가지 주제로 키워드를 내놨는데 ‘미디어 및 대중문화 활용’이 눈에 띄었다. 미디어 콘텐트 제작과 홍보를 강화하고 태권도 시범, 퍼포먼스, K팝과 결합한 문화 이벤트 등으로 젊은 세대와 소통하라는 내용이었다. 챗GPT는 “태권도의 세계화는 단순히 도장을 해외에 세우는 것을 넘어서 스포츠, 교육, 문화, 외교 등 다양한 분야와 협력하며 끊임없이 혁신하고 현지화 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라고 조언했다.

전 세계 태권도를 관장하는 세계태권도연맹(World Taekwondo·WT)은 이 조언을 충실히 실행하고 있다. 물론 챗GPT가 생기기 훨씬 전부터다. 태권도는 끊임없는 변신과 모든 세대에 다가서려는 노력으로 ‘대한민국의 국기(國技)’를 넘어 ‘세계인이 즐기는 스포츠’로 발돋움했다.

WT 가입국(213개)은 유엔(193개)과 국제축구연맹(FIFA·212개)보다 많고, 태권도를 수련하는 사람은 2억 명이 넘는다. 올림픽에는 남녀 4개씩 금메달이 걸려 있는데 아프리카, 동남아 등 올림픽에서 소외됐던 국가들이 메달을 다수 가져갔다. 2020 도쿄 올림픽에서는 7개국이 금메달 8개를 나눠 가졌고, 종주국 한국은 ‘노 골드’였다. 당시 뉴욕타임스는 ‘태권도는 특정 국가에 쏠리는 스포츠가 아니라 열심히 하면 누구나 메달을 가져갈 수 있는 스포츠’라고 썼다.

세계태권도연맹 가입국, 유엔보다 많아
전 세계를 돌며 태권도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알리는 첨병이 있다. ‘태권도 시범단’이다. 문체부 산하 단체인 국기원 소속 시범단은 주로 정부 행사나 해외 귀빈을 맞을 때 활약한다. 대한태권도연맹이나 대학 소속 시범단도 뛰어난 기량을 자랑한다.

그 중에서도 WT 태권도 시범단의 활약은 독보적이다. 2009년 창단한 WT 시범단은 2021년 6월 미국 NBC ‘아메리카 갓 탤런트(AGT)’에서 8강 직행을 뜻하는 ‘골든 버저’를 받았다. AGT는 노래·춤·마술 등 특별한 재능을 발굴하는 오디션 프로그램이다. WT 시범단은 칼 군무를 연상시키는 품새, 동료를 밟고 4m 이상 날아올라 6개의 송판을 잇달아 격파하는 묘기, 힘과 아름다움이 넘치는 발차기를 선보였다. 심사위원들은 “용기, 자신감, 상호존중을 느꼈다”며 주저 없이 골든 버저를 눌렀다. 이 영상은 유튜브에서 10일 만에 조회수 1000만을 넘겼다.

지난 6월 20일에는 WT 시범단(단장 나일한)이 한국수력원자력의 체코 두코바니 원자력발전소 계약 체결을 축하하는 현장 공연을 선보였다. 관객은 낯익은 복장의 출연진이 펼치는 퍼포먼스에 환호했다. 넷플릭스 최고 인기작 ‘오징어 게임’ 콘셉트를 따온 공연이었다.

빨강색 상하의와 검은 마스크를 한 ‘병정’들이 일사불란한 동작으로 ‘칼 품새’를 보여준 뒤, 녹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주인공이 병정들 사이를 붕붕 날아다니며 현란한 발차기로 송판을 격파했다. 공연 막판 시범단이 ‘HARMONY BRINGS GLORY(조화 속의 영광)’라는 현수막을 펼치자 관객은 환호성과 기립박수로 화답했다. 이 문구는 태권도의 핵심 가치인 존중·통합·전통을 표현한 것이다. 나일한 단장은 “K원전의 수출을 축하하는 자리에 K컬처 대표상품의 옷을 입은 WT 태권도 공연이 이뤄졌다는 게 큰 의미를 갖는다”고 말했다.

WT 시범단의 나일한 단장(맨 앞)과 단원들. [사진 세계태권도연맹]
WT 시범단은 큰 공연을 앞두고 ‘콘셉트’를 잡는 데 온 힘을 기울인다. 방문하는 국가의 문화와 전통, 음악, 복식 등을 연구하고 이를 공연에 담아내기 위해 아이디어를 짜낸다. WT 시범단에는 총감독을 비롯해 연출·의상·음악·안무 감독이 있다. 이들은 매주 목요일에 모여 공연의 방향성과 디테일을 의논한다.

시범단의 박진수 총감독은 “이번 오징어 게임 콘셉트는 지난 5월 아랍에미리트 후자이라 공연에 맞춰 준비했다. 세계인에게 친숙한 작품을 공연 속에 어떻게 풀어낼까 고민했다. 새로운 공연을 만들 때마다 태권도의 기본 동작과 자세를 유지하면서도 흥미로운 요소들을 집어넣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 다행히 이번 공연은 완성도와 관객 호응 면에서 만족스러웠다”고 말했다.

고정 급여 없지만 돈보다 더 값진 경험
WT 시범단원은 총 50명인데 12명이 여성이다. 대학교·대학원에서 태권도를 전공하는 학생이 90 % 다. 이들은 매주 토요일 경기도 성남에 있는 가천대에 모여 하루 종일 강도 높은 연습을 한다.

이들에게 가장 무서운 적은 ‘부상’이다. 최고 4m 높이에서 연속 발차기로 송판을 격파하고 착지하는 과정에서 발목·무릎 등을 다칠 수 있다. 깨진 송판에 찔려 발을 다치는 위험도 감수해야 한다. 시범단 5년 차인 강수찬 주장은 “공연장 조건이 천차만별이고 야외 공연도 많아 찰나에 집중력을 놓치면 실수가 나오고, 실수는 사고로 연결된다”고 설명했다. 남녀 단원들 사이에 달달한 로맨스도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강 주장은 “워낙 초긴장 상태로 공연을 준비하고 성공시켜야 하기 때문에 그런 감정을 느낄 틈이 없다. 아직 커플은 없는 것 같다”며 웃었다.

이들은 고정 급여를 받지 않고 훈련 수당과 해외 공연 시 체재비 정도만 지원받지만 큰 불만은 없다. 돈보다 더 값진 경험을 하기 때문이다. 전 세계 도시를 돌며 태권도 정신과 아름다움을 알리면서 평생 가 보지 못할 곳을 여행하는 보너스도 얻는다. 그래서 매년 신입 단원 모집에는 내로라하는 태권도 고수들이 지원해 10대 1이 넘는 경쟁률을 보인다.

조정원 WT 총재는 “태권도 품새를 음악·춤·의상 등 그 나라 문화와 연결하면 강력한 파워를 낼 수 있다. 각국 시범단이 모여 세계대회를 하자는 제안도 있다”고 말했다. 태권도 시범이 세계적인 문화상품으로 떠오를 가능성도 보인다.

난민선수 올림픽 출전 길 열고, 사우디서 여성 태권도 대회도
조정원 세계태권도연맹 총재가 토마스 바흐(오른쪽) 전 IOC 위원장으로부터 ‘올림픽컵’을 받고 있다. [사진 세계태권도연맹]
여성·장애인·어린이·난민. 세계태권도연맹(WT)이 태권도 세계화를 위해 특별히 힘을 쏟는 분야다. 태권도를 통해 평화와 화합을 이룬다는 목표에 부합한 타깃팅이다. WT는 2004년부터 아랍권 여성들에게 히잡을 쓰고 경기를 해도 좋다고 허용해 줬다. 그 후 중동 지역 태권도 인구가 크게 늘었고, 이란·이라크·요르단 등이 태권도 강국으로 성장했다. 2021년 11월에는 사우디 수도 리야드에서 36개국이 출전한 국제 여자 태권도대회가 열려 세상을 놀라게 했다. WT는 “여성 차별 국가라는 이미지를 불식시켜야 아시안게임도 올림픽도 유치할 수 있다”고 2년 동안 사우디 측을 설득했다고 한다.

WT는 2008년 태권도평화봉사재단을 창설해 경제적으로 어려운 나라 어린이에게 태권도를 가르치고 장비와 용품을 지원했다. 그러던 중 2015년 튀르키예 해변에 다섯 살 난민 아이의 시신이 떠오른 걸 계기로 난민에 대한 관심이 커졌고, 그들을 돕기 위해 2016년 태권도박애재단(THF)을 만들었다. 튀르키예·르완다·지부티·요르단 등지의 난민 캠프에 운동 시설을 만들고 현지 사범을 교육해 태권도를 보급했다. 오갈 데 없이 방황하는 아이들에게 태권도를 통해 삶의 목표과 희망을 심은 것이다. 이걸 보고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2017년에 올림픽난민재단을 만들었고, 올림픽에 난민 선수가 출전하는 ‘역사의 진보’가 이뤄졌다.

WT는 요르단 아즈락 난민촌에 세운 태권도 전용 체육관을 레슬링·유도·탁구 등 다른 종목도 함께 쓸 수 있도록 했고, 10개 종목으로 겨루는 ‘Hope and Dreams Sports Festival’도 개최하고 있다. THF의 인도주의적 활동을 이끌어 온 공로를 인정받아 조정원 WT 총재는 2023년 11월 토마스 바흐 IOC 위원장으로부터 ‘올림픽 컵’을 수상하기도 했다.

정영재 칼럼니스트. 중앙일보·중앙SUNDAY 스포츠 기자 출신 칼럼니스트. 2013년 스포츠 기자의 최고 영예인 ‘이길용체육기자상’을 받았다. 현재 대학 등에서 강의하고 있으며 『스포츠 다큐: 죽은 철인의 사회』 등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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