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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을 앞섰다, 대담했던 추상화가

중앙일보

2025.07.20 08:17 2025.07.20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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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스톡홀름 작업실에 앉은 33세 힐마 아프 클린트. [사진 힐마아프클린트 재단]
피에트 몬드리안, 바실리 칸딘스키, 그리고 힐마 아프 클린트. 이 세 화가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1944년, 같은 해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추상화를 그렸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화폭에 음악을 옮기듯 그린 러시아의 칸딘스키, 빨강·파랑·노랑 삼원색과 직선만으로 그림을 그린 네덜란드의 몬드리안은 추상 미술의 선구자로 불렸다. 그러나 칸딘스키보다 5년 앞선 1906년 추상화를 그린 스웨덴 여성 화가 힐마 아프 클린트(1862~1944)는 최근에야 그 이름이 알려졌다.

부산 사하구 부산현대미술관에서 ‘힐마 아프 클린트: 적절한 소환’이 19일 개막했다. 100년도 더 전에 미술사의 변방에서 활동하다 잊힌 그의 국내 첫 회고전이다. 대표작 ‘10점의 대형 회화’, ‘신전을 위한 그림’, 인식의 세계를 나무의 형상으로 담은 ‘인식의 나무’, 미시 세계를 그린 ‘원자’ 연작을 비롯해 드로잉과 노트 등 139점을 선보인다.

세로 315㎝ 대작 시리즈인 ‘10점의 대형 회화’ 중 ‘No. 7, 성인기’(1907). [사진 힐마 아프 클린트 재단, 마노엔터테인먼트]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10점의 대형 회화(The 10 Largest)’ 연작. 세로 3m 넘는 대작 10점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동그라미, 네모, 소용돌이, 달팽이 모양 등으로 경쾌하게 화면을 채운 추상화에 45세 힐마는 유년기·청년기·성인기·노년기라는 인생의 네 단계를 부제로 붙였다. 태어나 자라고 늙고 죽는 생애주기를 형태와 색채만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단 두 달 만에 완성하느라 유화보다 빨리 마르는 달걀노른자 안료인 템페라로 큰 종이에 속도감 있게 그렸다. 118년 전 그림이 연필 밑그림부터 분홍·하늘색·오렌지색의 밝은 색감까지 생생하다. 지금 봐도 시대에 뒤떨어져 보이지 않는 이 그림, 당시 사람들에겐 얼마나 낯설었을까.

힐마 아프 클린트, 최근 세계 미술계에서 자주 불린 이름이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그린 그의 크고 대담한 그림은 21세기 들어 새삼 재발견됐다. 생전에 이해받지 못했던 그는 “일부 그림은 사후 20년 간 열람을 금지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평생 독신으로 지내며 그린 1300여 점의 작품과 2만 6000여쪽 분량의 기록을 조카에게 남기고 82세로 세상을 떠났다.

상영하는 다큐멘터리 ‘힐마 아프 클린트-미래를 위한 그림’의 한 장면. 칸딘스키·몬드리안에 앞선 힐마 예술의 혁신성을 보여준다. [사진 힐마 아프 클린트 재단, 마노엔터테인먼트]
오래 묻혀 있던 그림이 1980년대 이후 간간이 알려졌고, 2018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 나와 60만 넘는 관객을 모았다. 파리 퐁피두센터, 런던 테이트 모던에서도 차례로 그를 소개했다. 아시아 순회전으로 도쿄 국립근대미술관을 거쳐 부산에 상륙했다.

해군 장교의 딸로 태어난 힐마는 스웨덴 왕립 미술아카데미를 우등 졸업했다. 초상화·풍경화를 그리며 스톡홀름의 수의학 연구소에서 삽화가로 일했다. 영성주의에 매료, 동료 여성들과 함께 5인회를 결성했다. 자신을 영매라 여기며 초월적 존재로부터 받은 메시지를 자동 기법으로 그렸다고 했다. 1906년 최초의 추상화 ‘신전을 위한 그림’ 연작이 나온 배경이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그림으로 옮긴다는 생각이 강했다.

만년의 ‘무제’ 연작 Ⅱ(1919)에는 새나 식물을 묘사한 세밀화 아래쪽에 추상적 기호와 메모를 남겼다. [사진 힐마 아프 클린트 재단, 마노엔터테인먼트]
전시를 기획한 최상호 큐레이터는 “추상화를 그린다는 자의식 없이 시작했고, 자신을 영매로 여긴 그를 예술가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현대 미술에서 어떻게 봐야할까 의구심이 있었다”며 “추상 미술의 선구자라는 명명 이상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려 했다”고 말했다. 이런 의구심에 대한 답변은 지금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 열리는 ‘꽃의 이면엔 뭐가 있나’에서 찾을 수 있다.

57세의 힐마는 병든 어머니를 모시고 2년간 섬에서 지낸다. 이곳 식물을 채집해 꽃 세밀화를 그렸다. MoMA가 2022년 컬렉션에 추가한 ‘자연 연구’ 46점이다. 포플러·아네모네·붓꽃·새를 섬세하게 그린 삽화엔 독특한 점이 있다. 힐마는 삽화 가장자리에 삼각형·사각형 같은 도형을 활용한 기호를 조그맣게 그리고 간단한 설명을 적었다. 자연에서 유래한 추상의 설계도다. 힐마는 8월 26일 개막하는 서울 미디어시티 비엔날레 참여작가 49팀에도 백남준, 요셉 보이스, 하룬 미르자 등과 함께 이름을 올렸다.

부산현대미술관 강승완 관장은 “남과 여, 정신과 물질의 이분법을 초월한 힐마의 근원적 질문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하다”고 말했다. 전시장에선 다큐멘터리 ‘힐마 아프 클린트-미래를 위한 그림’(감독 할리나 디르스츠카)을 상시 상영한다. 영화의전당에서도 영화 ‘힐마’(감독 라세 할스트룀)를 볼 수 있다. 전시는 10월 26일까지, 성인 1만원.



권근영([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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