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산업에는 기술 뿐 아니라 사람과 권력, 시대가 얽혀 있다. 순간의 결정이 이후 산업 지형을 크게 바꾸는데, 결정 이면에는 정치권의 입김, 시장 사이클, 오너의 결단, 이사회의 셈법이 복잡하게 얽혀있다. The JoongAng PLUS K반도체 연구는 권력 질서, 조직과 인물의 판단이 만들어낸 지난 역사를 복기하며, 다시 부상하는 한국 반도체의 가능성과 한계를 짚어본다.
◆ ‘LG 구 회장과 반도체’= 2024년 6월, 국내 반도체 업계에선 사진 한장이 화제였다. 구광모 LG그룹 회장이 인공지능(AI) 반도체 스타트업 텐스토렌트의 짐 켈러 최고경영자(CEO)와 나란히 서서 미소 짓는,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날아온 사진이었다. 짐 켈러 CEO는 AMD의 중앙처리장치(CPU), 애플의 모바일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 테슬라의 자율주행용 AI칩을 설계해 ‘현직 전설’로 꼽히는 인물. 사진의 메시지는 분명했다. ‘LG가 AI 반도체 판에 뛰어들었다.’ 한편으로는 25년 전의 회한을 되살린다. LG는 한때 세계 5위였던 반도체 사업을 타의로 내려놔야 했었다.
“반도체는 선친께서 일으키신 사업으로 저희에겐 가족과도 같습니다. 재무구조도 우수합니다(구본무 LG 회장).”
1999년 1월 6일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에서 김대중 대통령(DJ)과 마주한 구본무 당시 LG그룹 회장이 말했다. LG반도체를 지키고 싶다는 뜻을 전했으나 DJ는 침묵했다. ‘재고의 여지는 없구나….’ 직감한 구 회장은 결국 다시 말했다. “아쉽지만, 국가 경제를 위해 LG반도체 지분 100%를 모두 넘기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독대는 30분 만에 끝났다.
현 SK하이닉스의 전신인 현대전자와 LG반도체의 합병, 이른바 ‘반도체 빅딜(대기업 간 사업 맞교환)’의 물밑 이야기다. 1990년대 한국 반도체 산업은 삼성(세계 D램 점유율 1위)·현대(2위)·LG(5위)의 삼각 편대였지만 IMF 외환위기 직후 출범한 DJ 정부는 1998년 기업 간 중복 투자를 정리하는 빅딜을 추진했다. 반도체 1위 삼성은 두고, 현대와 LG를 묶는 안이 추진됐다. 1979년 대한반도체를 인수하고 금성반도체를 세우면서 본격 시작된 LG의 반도체 사업은 그렇게 현대에 넘어갔다.
※참고: 『(DJ vs 재벌) 빅딜게임 :월간중앙 기획 시리즈』(1999, 이영렬)
◆ 숨겨왔던 LG의 반도체 DNA= 2023년 7월 LG전자는 가전용 AI 반도체 ‘DQ-C’를 깜짝 공개했다. 3년간 개발해 자체 설계한 칩이다. 딥러닝을 통해 탈수 시 세탁물을 균일하게 분산시키거나 음성으로 가전을 제어하는 등의 AI 기능들이 DQ-C를 기반으로 작동한다. 표면적으로 LG의 ‘반도체 사업’은 없지만, 내부에서는 TV·가전 제품에 들어가는 칩을 직접 설계하고 있다. 그 핵심은 600여 명 규모의 LG전자 시스템온칩(SoC) 센터.
지난 6월 23일 서울 양재동 SoC센터에서 만난 김진경 센터장은 “우리는 알파고 열풍(2016년) 이전인 2015년부터 AI 관련 연구를 해왔는데, AI 가전에 들어가는 ‘온디바이스 AI 칩’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요즘은 물 만난 고기가 됐다”고 했다. 그는 “우리 제품에 최적화된 칩을 써야 원하는 기술을 구현할 수 있고, 마진도 높일 수 있다”고 덧붙였다.
TV의 음성·영상 인식 제어와 화질 조절 기능에 적용되던 AI칩은 이후 세탁기·냉장고·에어컨 등 생활가전 전반으로 확대 적용됐다. 현재는 차량용 반도체 기술 확보에도 공을 들이고 있다. 구광모 회장이 짐 켈러 CEO를 만난 것도 차량용 반도체 개발 과정에서 텐스토렌트의 AI 반도체 설계 기술을 접목하기 위해서다.
◆ 반도체 회사로 탈바꿈한 한화·두산= “헤이, 토니! 잘 지냈어 친구?(Hey, Tony. How are you, pal?).” 2022년 7월 백악관을 찾은 최태원 SK그룹 회장을 기다린 건 ‘친구 토니’를 외치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었다. 물론 이날의 환대는 SK그룹의 미국 내 투자 발표 때문이었지만, ‘미국 대통령도 친구 먹는 반도체 기업’의 존재감을 대내외에 드러내기엔 충분했다. 김창욱 보스턴컨설팅그룹(BCG) 파트너는 “대기업에게 반도체 사업은 높은 성장률을 담보할 뿐만 아니라 전략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라고 말했다. 돈뿐 아니라 ‘존재감’에서 반도체 산업은 압도적이라는 거다.
한화그룹의 기계장비 계열사인 한화정밀기계는 올해 초 반도체 기업 정체성을 명확히 하겠다며 사명을 ‘한화세미텍’으로 바꿨다. 한화세미텍은 지난 3월 SK하이닉스로부터 420억원 규모의 ‘TC본더’ 납품 계약을 따냈다. TC본더는 고대역폭메모리(HBM)의 필수 장비로, 한미반도체가 시장을 독점했으나 한화가 개발 착수(2020년) 5년 만에 납품에 성공했다.
한화의 반도체 사업 강화는 ‘미래 승계’와도 직결된다. 김승연 회장의 장남 김동관 한화 부회장은 방산·우주·에너지 분야에서, 차남 김동원 한화생명 사장은 금융 부문에서 각각 입지를 다졌다. 유통 사업 중심으로 활동하던 김동선 한화호텔앤드리조트 부사장은 지난 2월 한화세미텍 미래비전총괄로 합류하며 반도체와 로봇 등을 중심으로 존재감을 넓히기 시작했다. 사명 교체는 그 신호탄이었다.
‘한화스러운’ 과감한 행보도 뒤따랐다. 한화세미텍은 SK하이닉스에 ‘TC본더를 제때 납품하지 않아 손실을 입힐 시 최대 1000억원까지 보상하겠다’는 내용의 ‘납품 계약 이행 보증’을 제공했다. 자사 기술력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낸 대목이다.
‘중후장대’ 산업을 기반으로 성장한 두산은 4세 경영인 박정원 회장이 2016년 그룹 회장에 오른 이후 ‘첨단 미세’의 반도체로 입지를 넓히는 중이다. 박 회장은 2022년 4월 반도체를 그룹의 새 성장 축으로 삼겠다며 반도체 테스트 기업 ‘테스나’를 4600억원에 인수했다.
두산그룹 지주사인 ㈜두산의 전자BG 사업부가 해오던 반도체 사업도 AI 훈풍을 탔다. 전자BG는 반도체·통신장비 등에 들어가는 소재를 생산하는데 지난해 엔비디아에 주력 제품인 동박적층판(CCL)을 납품하기 시작하면서 사상 첫 매출 1조원을 돌파했다.
◆ 설 자리 좁아지는 한국… 대만의 부상=“대만을 AI의 중심으로 만들겠다.” 지난 5월 19일 대만 타이베이에서 열린 ‘컴퓨텍스 2025’ 기조연설에서 젠슨 황 엔비디아 CEO의 발언이다. 그는 타이베이 북부에 AI 반도체 설계와 양자컴퓨팅 등 핵심 기술을 개발하는 연구소를 설치하겠다고 밝혔다. 미래 AI 기지로 ‘대만’을 점찍은 것이다.
한국은 1990년대 이후 공인된 ‘메모리 최강자’로 군림해 왔다. 그런데 AI 생태계가 확장되며 상황이 달라지고 있다. 이주완 인더스트리 애널리스트는 “지금처럼 메모리 의존도가 높으면 점차 단순 부품사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며 “설계 역량을 높여 비(非)메모리 시장 공략에 우선순위를 둬야 한다”고 말했다.
삼일 PwC는 지난달 발표한 ‘AI 품은 반도체: K반도체, AI에서 찾는 도약 기회’ 보고서에서 “한국은 메모리 시장의 3배 규모에 달하는 비메모리 부문에서는 경쟁력이 취약하다”며 향후 파운드리 시장에서 기회를 노려야 한다고 봤다.
다만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AI 시스템반도체는 메모리 없이는 가동할 수 없는 분야다. 잘하던 메모리를 두고 시스템반도체 쪽에 지나치게 집중하다 보면 둘 다 놓칠 수 있다”며 “그간 잘해 온 메모리 분야 기술을 정교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가장 거대한 시설로 가장 미세한 제품을 만드는 반도체 산업 뒤에는 인간사 오욕칠정이 다 숨어 있습니다. 한국을 넘어 세계 기업과 관계 속에서의 K반도체 산업을, 딱딱한 기술이 아닌 사람의 이야기로, 과거가 아닌 현재와 미래를 중점으로 들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