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신경계 중환자의학 1세대 뇌파 등 작은 신호 계기판 삼아 치료 폐·심장 등 여러 장기 다함께 살펴 전담 전문의 태부족, 인력 충원 필요
깜깜한 밤바다 위, 창밖으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비행 중인 조종사는 계기판 하나에 의지해 활주로를 찾아간다. 서울대병원 신경과 고상배 교수는 신경계 중환자 진료를 이렇게 비유한다.
“환자가 의식을 잃으면 의사 눈에 보이는 건 거의 없습니다. 뇌압, 산소 포화도, 뇌파 같은 수치만이 환자 상태를 알려주는 유일한 단서가 되죠. 이 작은 신호를 계기판 삼아 치료 방향을 잡아가야 합니다. 하나라도 놓치면 생명은 더 위태로워집니다.”
고상배 교수는 국내 신경중환자의학을 개척한 인물이다. 2009년 미국 컬럼비아대병원에서 신경중환자의학을 배우고 돌아와 국내에 신경계 중환자실 필요성을 꾸준히 알려왔다. 국내 연구진 최초로 미국신경중환자학회 아시아 석학 회원이 된 것도 그의 활동을 증명한다. 고 교수는 “신경계 중환자실은 누군가의 희망을 끝까지 지켜내는 곳”이라고 표현했다.
신경계 중환자실은 심각한 뇌 손상을 입은 환자를 치료하는 공간이다. 주로 중증 뇌졸중(뇌경색·뇌출혈) 환자가 입원한다. 일반 중환자실과 달리 신경학적 진료에 특화된 의료진이 24시간 환자를 돌본다. 이들은 의식이 사라진 환자의 뇌 상태를 모니터링해 작은 변화에도 즉각 대응한다. 병원의 역량이 집중되는 최후 방어선에서 중환자가 마지막으로 기댈 수 있는 곳이다.
뇌졸중은 뇌혈관이 갑자기 막히거나 터져서 나타난다. 처음엔 증상이 가벼워 보여도 순식간에 상태가 나빠질 수 있다. 의식이 떨어지면서 마비가 진행되고 폐와 심장 문제로 번지기도 한다. 예측 가능하지만 대비하지 않으면 생명을 잃을 수 있다. 고 교수는 “뇌 기능이 무너지면 다른 장기까지 연쇄적으로 영향을 받는다”고 설명했다.
“신경계 중환자실은 뇌만 들여다보는 곳이 아닙니다. 뇌는 폐·심장과 긴밀히 얽혀 있어요. 여러 장기의 상태를 함께 살펴야 하는 이유입니다. 복잡한 상황을 즉시 파악하고 대처하려면 신경계 중환자 전담 전문의가 더 많이 필요합니다.”
과거에는 신경계 중환자 전담 전문의라는 개념조차 없었다. 신경과, 호흡기내과, 심장내과 의사가 따로 오가며 신경계 중환자를 봤다. 고 교수는 “전공의 시절만 해도 뇌와 폐, 심장을 각 진료과에서 따로 봤다”며 “환자 상태가 급격히 나빠져도 자문서를 돌리고 답을 기다려야만 했다”고 말했다. 그사이 골든타임을 놓치는 일이 많았다.
단일 장기만 보는 진료로는 한계가 분명했다. 다학제적 접근이 필수적이라는 걸 체감했다. 고 교수는 그렇게 국내 신경계 중환자실 진료 체계를 세우는 일에 앞장섰다. 그가 강조하는 다학제란 여러 진료과가 협력해 환자를 돌보는 것을 뜻한다.
“중증 환자일수록 전문의 간 신속한 판단이 생사를 가릅니다. 특히 중환자실에 전담 전문의가 있으면 의사 결정이 빨라져요. 이는 곧 환자의 생존율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국내 다기관 연구에선 신경계 전담 전문의가 있는 병원은 그렇지 않은 곳보다 사망률이 1.6배 낮은 것으로 나타납니다.”
문제는 중환자를 돌볼 사람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현재 신경계 중환자 전담 전문의 수는 손에 꼽힐 정도로 적다. 신경계 중환자실이 따로 있는 국내 병원도 드물다. 서울대병원 신경계 중환자실에선 3명이 돌아가며 매일 환자 곁을 지킨다. 이들에겐 주말도, 휴일도 없다. 고 교수는 “지방이나 중소 병원에선 1명이 모든 환자를 보기도 한다”며 “중환자 진료를 뒷받침할 정책과 전담 인력이 없으면 구조는 무너지게 돼 있다. 신경계 중환자실은 사람과 시스템이 동시에 받쳐야 돌아간다”고 말했다.
중환자 치료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순간의 연속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묻자 고 교수는 30대 수학 강사였던 뇌염 환자를 떠올렸다. 의식을 잃었던 이 환자는 한 달 만에 기적처럼 깨어났다. 퇴원하는 날 환자는 고 교수에게 코팅을 입힌 네잎클로버를 건네며 이렇게 말했다. “새 삶을 얻었으니 앞으로는 남을 위해 봉사하며 살겠습니다.” 고 교수는 아직도 그때를 잊지 못한다.
“중환자의학은 고되고 보상이 적어도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하는 분야입니다. 가벼운 병은 누구나 치료할 수 있지만, 중환자의학은 아무나 못 합니다. 힘들어도 결국 사람을 살리는 일이 가장 보람된 길이라고 생각해요. 끝까지 가능성을 붙잡아야 합니다. 1%라도 그 환자에겐 온전한 100%의 희망이니까요.” 깜깜한 밤바다를 나는 조종사처럼 고 교수는 서울대병원 가장 깊은 곳에서 오늘도 부단히 안전한 활주로를 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