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에는 정부 관여를 줄이고 기술 개발을 기업에 맡기며 대학은 인력 양성에 집중해야 한다’는 주장에도 일정한 근거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장에서 현실을 직시해야 하는 전문가라면 이 같은 주장에 놀랄 수밖에 없다.
반도체 산업의 급성장과 기술 발전 가속화로 대학의 연구시설이 상대적으로 낙후되었고, 이로 인해 대학의 역할을 인력양성에만 한정하려는 인식이 일반화되었다. 이러한 관성적 사고는 AI 대전환이나 반도체 전쟁과 같은 위기 상황에서 폭넓은 논의 대신, 기업 지원 확대와 대규모 인력양성만을 해법으로 제시하게 한다. 동시에, 정부를 향해 ‘예산만 지원하되 간섭하지 말라’는 요구가 반복된다.
이 과정에서 자주 사용되는 근거는 대체로 기업설문조사에 따른 ‘몇 년 후에 어떤 산업에 얼마나 많은 인력이 부족하다’는 식의 정량적이고 비과학적인 통계수치다. ‘AI 반도체 인재 십만 양병설’ 또한 현실적으로 과학성이 아쉬운 탁상공론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시간적 한계. 글로벌 기술 패권 경쟁에서 경쟁력 있는 인재 육성에는 10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지만, 우리에겐 그만한 여유가 없다. 둘째, 경쟁 포인트에 대한 오해. 인력문제의 본질은 단순한 양적 충원이 아니라 세계 최고 수준 인재 확보 경쟁이다. 셋째, 인력 성장에 대한 오해. 우수 인재는 초격차 기술 개발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길러지고, 경쟁력 강화 및 처우 개선을 통해 산업계로 자발적으로 유입된다. 인력을 인위적으로 대량 양성해 투입하자는 것은 실효성이 떨어진다.
최근 미·중 갈등으로 미국 반도체 산업을 지탱해온 중국계 엔지니어의 유입이 줄고 있다. 이로 인해 미국 내 반도체 인력 수요가 확대되며, 한국 엔지니어들에 대한 미국계 기업의 채용이 빠르게 늘고 있다. 양국 간 임금, 승진, 은퇴, 스톡옵션 같은 제도적 차이를 고려할 때, 지금 논의해야 할 것은 인력양성 확대보다 우수 인재 유출을 막을 제도적 보완책이다.
기술개발의 측면에서 보면 미국의 국립반도체기술센터(NSTC), 중국의 반도체 굴기, 일본의 반도체 재건전략 등 주요 경쟁국들은 사실상 국가 총동원체계에 가까운 전략을 펼치고 있다. 만약 맨해튼 프로젝트가 기업에만 맡겨졌고, 대학이 인력양성에만 집중했다면 원자폭탄을 제때 개발하지 못했을 것이다. 현재의 기술 패권 경쟁 또한 그 못지않은 총력전의 양상을 보인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인력양성 확대나 기업 중심의 지원이 아니다. 효과적인 기술 경쟁 수단과 초격차 기술을 신속히 개발하여, 그 결과물을 곧바로 산업 경쟁에 활용할 수 있는 실질적 연구개발 체계의 구축이 무엇보다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