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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련의 시선]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중앙일보

2025.07.21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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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련 산업부장
기업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에 ‘주주’를 포함한 상법이 공포됐다. 재계 전반은 여전히 부정적이지만, 다른 기류도 감지된다. 10대 그룹의 사장급 임원 A씨 얘기다. “오래전에 사외이사 들어오면 기업 다 망한다고 난리였는데, 어떻습니까. 망한 기업 있습디까? (상법 개정도) 역사의 도도한 흐름입니다. 얼른 적응해야죠.” 뜻밖의 반응이었고, 뼈 있는 말이었다.

IMF 외환위기 직후 1998년 한국은 대기업 총수의 제왕적 경영을 견제하고 경영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사외이사를 도입했다. 당시에도 재계는 극렬히 반대했지만 결국 받아들이고 적응해나갔다. 사외이사를 ‘거수기’로 만들기는 했지만 말이다.

상법 개정, 그 후가 더 문제
‘주가 상승 땔감’으론 한계
선진 지배구조 해법 찾아야

이번 파도에 기업들은 어떻게 대응할까. 우선 ‘포이즌 필이나 차등의결권 같은 경영권 방어 제도를 보장해달라’고 요구 중이다. 최근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겸 SK 회장은 ‘자사주 소각 의무화’를 담은 여당의 상법 추가 개정안에 대해 “앞으로 과연 자사주를 사겠나”라고 반문했다. 자사주를 경영권 방어 수단으로 활용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봐달라는 취지겠으나, 효과적인 설득이 될지 의문이다.

물론, 정권 초에 상법 개정부터 해치우겠다고 벼른 정부·여당이 개정하자마자 2·3차 개정을 밀어붙이는 속도는 문제다. 이사와 경영진의 ‘경영 판단’에 배임죄(형법)를 적용하지 않도록 하는 보완 입법 없이, 노쇠한 제조업의 경쟁력을 어떻게 끌어 올릴지에 대한 구상은 내놓지도 않고 기업을 옥죄는 모양새라서다. 그렇다고 해도, 재계가 이사회를 앞으로 어떻게 개선할지에 대한 각오나 설명 없이 방어권만 주장해선 여론 설득력이 떨어진다. 이렇게 또 떠밀리듯 적응할 텐가.

자사주 문제부터 보자. 경제적 파급 효과나 기업의 경쟁력 측면에서 보면, 자사주를 매입해 대주주 히든카드로 보유하든 소각해 주주 이익을 챙기든 어느 쪽도 그 돈을 연구개발(R&D)이나 신사업에 재투자하는 것보다는 못 하다. 일례로, 매년 자사주 소각 규모를 경신하고 있는 미국 빅 테크 M7 기업들의 치솟는 주가에 주주들은 환호하지만, 미국 산업 전체로 보면 긍정적이라 하기 어렵다. 자본이 소수의 소프트웨어 기업에 더 집중되고, 나머지 기업 주가 상승은 제한적이다. 일자리가 늘어나는 효과도 없다. 그래서 바이든 정부 때 민주당 주도로 연 100만 달러 이상의 자사주 매입 시 세금 물리는 법이 생겼다. 주식을 성과 보수로 받는 미국 기업 경영자들이 자사주 소각으로 그들의 배만 불린다는 비판과 함께.

상법이 이미 개정된 만큼 A씨 말처럼 한국 자본주의 역사의 흐름 위에서 보는 게 현실적이다. 서구에선 주주를 회사의 주인으로 보는 주주우선주의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 대안을 찾는 단계로까지 진화했지만, 한국은 아직 ‘주주가 보유 주식만큼의 주인 대접도 못 받는’ 전근대에 머물러 있다는 불만이 쌓인 결과다. 이를 포착한 이재명 정부는 이를 주가 부양의 땔감으로 잘 써먹고 있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당분간 주가는 오르겠으나, 한국 기업·산업의 체력은 제자리일 가능성이 크다. 자유무역 시대의 분업 질서가 끝난 요즘 한국 기업들은 앞날이 안 보인다고 한다. 단기차익을 노리는 주주들의 관심사는 아닐 거다. 그러나 기업 노동자와 하청업체 경영진 및 직원들, 세수 부족에 시달리는 정부·지자체는 이미 그 여파를 느낀다. 주식회사의 법률적 주인은 주주들이지만, 기업이 그 주주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건 아니란 얘기다.

그래서 지금 상법 개정을 주가 상승의 동력으로만 소비해선 안 된다. 첨단 과학기술이 국가의 안보와 미래를 좌우하고 각국 정부와 기업이 한몸처럼 움직이는 지금, 기업의 지배구조는 어떠해야 하며 유능한 이사회는 어떻게 구축해야 하는지 머리를 맞댈 때다. 한국 대부분의 대기업들은 이 방정식을 아직 못 풀고 있다.

그런데 우리 기업들과 경쟁하는 대만·중국 기업들을 보면 나름 제 길을 찾은 것 같다. 이사회의 전문성·독립성을 중시하는 TSMC는 이사회를 반도체 전문가들로 채우고, 9명 중 8명은 외국인이다. 이들의 견제와 감독하에 창업자가 은퇴한 후에도 후계자들은 대만의 번영을 주도하고 있다. 중국 화웨이는 지분 1%도 안 되는 창업자가 가족경영을 하고 지분 98%를 보유한 직원들이 이사회 구성원을 뽑는데, 매출의 20.8%(삼성 11.6%)를 R&D에 투입하며 엔비디아를 위협하고 있다. 매년 채권을 발행해 자사주 소각을 반복하지만 AI 경쟁엔 한참 뒤처진 애플과 비교하면 어디가 더 혁신적이고 더 위협적인가. 승계 문제로 길을 헤매고, 개정 상법으로 다시 도전받고 있는 한국 기업들이 참고할 만한 사례다.





박수련([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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