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닫기

“논물 퍼가꼬 청소, 쎄가 빠져”…수도 끊긴 산청, 또다른 물난리 [르포]

중앙일보

2025.07.22 00:48 2025.07.22 04:53

  • 글자크기
  • 인쇄
  • 공유
기사 공유
22일 낮 12시쯤 경남 산청군 생비량면 도동마을에서 한 호우 피해 70대 주민이 고무대야에 받아 놓은 물로 세수하고 있다. 19일 극한호우 이후 이 마을에 수돗물이 나오지 않으면서, 주민들은 지자체 등이 급수한 물을 사용하고 있다. 안대훈 기자
“비 때문에 논에 이빠이(엄청) 차 있는 물을 퍼가꼬 와가(퍼 가지고 와서) 청소 해따아이가.”

22일 낮 12시쯤 경남 산청군 생비량면 도동마을. 체감온도 32.1℃의 찌는 듯한 땡볕 아래 만난 옥경선(69)씨는 “며칠째 물이 안 나와가, 논물을 집에 뿌맀다”며 이같이 말했다. “그 물도 30~40분 뿌리모 금방 동이 나가, 경운기에 큰 고무 대야를 싣고, 몇 번을 와따가따 하느라 이틀 동안 쎄가 빠지는 줄 아라따”고 했다.

지난 19일 극한호우로 양천강이 범람하면서 도동마을은 성인 허리춤 높이까지 물에 잠겼다고 한다. 이때 옥씨 부부가 사는 살림집 겸 점포(85.56㎡)도 침수됐다. 방바닥은 물론 가재도구가 모두 진흙 범벅이 됐다. 하지만 집에 수돗물이 나오지 않으면서 수해 복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도동마을 주민 대부분 비슷한 상황이다. 집집마다 놓인 고무대야엔 지자체가 급수한 생활용수가 담겨 있었다. 이마저도 아껴 쓰는 형편이다. 옥씨는 “아까바스(아까워서) 이 물로는 되도록 안 씻는데 너무 듭다(덥다)”며 세수를 했다. 단수 피해를 겪는 산청 신안면 한 마을에선 진흙 묻은 옷가지를 한가득 짊어지고 인근 비닐하우스를 찾는 주민들도 있었다. 농가 지하수 관정에서 나오는 물로 빨래하기 위해서다.

지난 21일 경남 산청군 신안면의 한 식당에서 식당 관계자가 공급받은 물로 흙탕물이 묻은 창문을 씻고 있다.   식당 관계자는 "호우 여파로 단전, 단수, 가스 공급이 중단됐고, 선풍기 돌릴 전기를 위층에서 끌어다가 쓰는 중이다"고 설명했다. 연합뉴스


700가구 수돗물 끊겨…비닐하우스서 옷 씻어

역대급 폭우로 12명이 숨지고 2명이 실종된 산청에서 나흘째 단수·정전 문제가 계속되면서 이재민들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 경남도·산청군 등에 따르면 이날 오전까지 산청 생비량·신등면과 신안면 일부 지역에 사는 700가구에 수돗물이 공급되지 않고 있다. 폭우 때 일부 수도 시설이 파손되거나, 전기가 끊기면서 취수시설이 한때 멈췄고, 이 시설 복구 이후엔 산사태 피해 복구 과정에서 수돗물 사용량이 폭증한 영향이 컸다.

이에 지자체는 수돗물 공급량을 분산하려고 현재 단수가 되지 않은 단성·신안면 6개 지역에 이날과 다음 날 제한급수를 실시한다. 또 전날부터 단수 지역에 민간급수차 7대, 소방급수차 12대를 투입했고, 이날부턴 시·군과 한국수자원공사 급수차를 추가로 동원한다.

22일 오전 경남 산청군 신안면 야정마을 한 비닐하우스에서 호우 피해 주민들이 농업용 지하수 관정에서 끌어올린 물로 진흙 범벅이 된 옷가지와 옷걸이를 세척하고 있다. 단수로 가정에 물이 나오지 않아서다. 안대훈 기자


220여 가구 나흘째 정전…통신 장애도 여전

정전도 문제다. 지난 19일부터 이날까지 1344가구가 정전 피해를 겪었고, 229가구엔 여전히 전기가 들어오지 않고 있다. 일부 지역에선 통신 장애도 발생 중이다. 통신3사 중계기 복구가 늦어지면서 지자체는 신속한 이동기지국 배치를 요청했다. 폭우로 쏟아진 토사와 낙석 등으로 막힌 도로 복구도 시급한 상황이다. 다만, 산청과 다른 지역을 잇는 주요 교통로인 국도 3호선(신안면 외송리 구간)은 전날 오후 11시부터 부분 개통했다.

지난 21일 경남 산청군 신안면의 한 식당에서 식당 관계자가 컵라면을 먹기 위해 도구를 챙기고 있다.   식당 관계자는 "호우 여파로 단전, 단수, 가스 공급이 중단됐고, 선풍기 돌릴 전기를 위층에서 끌어다가 쓰는 중이다"고 설명했다. 연합뉴스
산청을 포함해 호우 피해가 큰 의령, 합천 등 경남 곳곳에선 이번 호우로 도로(292개소)와 주택(675동)이 파손되고, 농경지(4236㏊)와 가축(26만4939마리)이 물에 잠기는 등 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잠정 집계됐다. 이날까지 경남에서 이번 호우로 대피한 7869명 중 957명이 여전히 귀가하지 못하고 있다. 미귀가자의 66.5%(627명)가 산청 이재민이다.


공무원과 주민 등 3563명과 굴삭기·덤프트럭·살수차 등 장비 1147대가 수해 현장에 동원돼 복구 중이다. 지난 3월 경북의 초대형 산불 피해지역 주민들도 산청을 찾아 복구에 힘을 보태고 있다. 이날 경남 합천·의령 피해 현장을 찾은 박완수 경남지사는 “도민이 하루빨리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도의 모든 역량을 집중하겠다”고 밝혔다. 김경수 지방시대위원회 위원장도 같은 날 경남 산청을 찾아 “재난 안전 관련 사전 예방·대비 과정에 지역 간 불균형으로 인한 문제가 없는지 점검하겠다"고 말했다.



실종자 4명 중 2명 발견…‘한발 늦은 대피령’ 도마 올라

호우 때 산청에서 실종된 4명 중 2명이 이날 숨진 채 발견됐다. 실종자 수색에 나선 지 나흘 만이다. 소방당국은 앞서 산청읍 모고리와 단성면 방목리에서 각각 실종된 70대 남성과 60대 여성을 사고 지역 인근 부유물 더미와 땅 속에서 발견했다. 이에 따라 산청 호우로 인한 사망자는 10명에서 12명으로 2명 늘었다. 남은 실종자는 신등·신안면에서 1명씩 실종된 80대 남성 2명이다.
22일 경남 산청군 산청읍 모고리에서 경남도청 소속 공무원이 최근 집중호우로 침수된 주택의 수해복구 작업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번 재난을 계기로 산사태 대응 체계를 재점검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산청읍 내리·부리 등 6곳에서 인명피해를 수반한 산사태가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지만, 산사태 취약지역으로 지정된 곳은 단성면 방목리 단 1곳인 것으로 산청군은 파악 중이다.

또 재난문자 발송과 대피명령도 미흡했단 지적도 이어지고 있다. 산림청은 폭우 당시인 19일 오전 6시 산청읍·단성면·신안면 일원에 산사태 경보를 일제히 발령했다. 하지만 군은 ‘산사태 위험’을 이유로 주민들에게 ‘즉시 대피’하라고 발송한 재난문자는 오전 10시 43분(신안면 외송리 심거마을 대상), 오전 11시 50분(산청읍 부리 내부마을), 오후 1시 19분(단성면 진자마을), 오후 8시 16분(생비량면 상능마을) 등 4건에 불과하다고 한다. 오후 1시 50분에는 사상 초유의 ‘전 군민 대피령’을 내렸지만, 인명피해는 대부분 오전 중 발생한 것으로 파악됐다.

안대훈([email protected])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