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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민주주의가 사라졌다" 박정희 유신 그날 'DJ 일기' 찾았다

중앙일보

2025.07.22 03:34 2025.07.22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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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망명일기'의 원문이 수첩에 손글씨로 적혀 있는 모습, [사진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나는 이 일기를 단장(斷腸)의 심정으로 쓴다. 그것은 오늘로 우리 조국의 민주주의가 형해(形骸)마저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박정희 정권은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하고 헌법 기능의 일부를 정지시켰다 (중략) 참으로 청천벽력의 폭거요, 용서할 수 없는 반민주적 처사이다. 지금 본국에서는 나의 사랑하는 동포들이 얼마나 놀라고 분노하고 상심하고 있을까."

1972년 10월 17일, 훗날의 대통령이자 당시 야당 의원 김대중(1924~2009)이 쓴 일기다. 단장((斷腸)은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슬픔을 가리킨다. 1971년 대선에서 근소한 차이로 패했던 김대중은 신병 치료를 위해 일본 도쿄에 머물고 있었다. 곧바로 망명을 각오한 그는 같은 날 일기에 "서울의 집과 기적적으로 통화가 되었다. 나는 아내에게 본국에 당분간 돌아가지 않을 결심을 암시해주었다"고 썼다.

망명 중이었던 1973년 2월 재일한국청년동맹이 주최한 강연회에서 연설하는 김대중. [사진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박정희 정권이 자칭 '10월 유신'이라 부른 비상계엄 전후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일본과 미국에서 망명 시기에 쓴 일기가 반세기 만에『김대중 망명일기』(한길사)로 발간됐다. 손글씨로 쓰여진 일기는 수첩 여섯 권 분량. 비상계엄 두 달 전인 1972년 8월 3일부터 1973년 5월 11일까지 223편이다. 이 수첩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3남 김홍걸 김대중·이희호기념사업회 이사장이 지난해 여름 동교동 자택에서 유품을 정리하다 발견했다. 김 이사장은 "있는 줄도 몰랐던 것이라 쓰레기통으로 들어갈 수도 있었는데 정말 운 좋게 발견을 했다"고 22일 출간 간담회에서 말했다.

한자와 영어, 일어가 섞인 일기 내용은 출간에 앞서 전문가 세 사람의 판독·정리 작업, 또 다른 전문가들의 검토 작업을 거쳤다. 박명림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관장은 특히 "당시 비상계엄의 의미에 대해 신속하고 정확한 판단이 놀랍다"며 "박정희 정부의 위협과 감시에도 일관되게 타협하지 않고 민주주의, 자유, 국민의 편에서 투쟁하겠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다"고 말했다.

"이미 예견한 대로 박정희 씨의 영구집권을 위한 내용으로 충만되어 있으며 삼권을 완전히 장악한 초(超)독재의 헌법안이다. 이로써 불행히도 내가 작년 선거 당시 "이번에 실패하면 앞으로는 다시 국민의 손에 의한 정권교체의 기회는 없을 것이며 무서운 총통제의 시대가 올 것이다"라고 한 그대로가 되고 말았다."(1972년 10월 27일)

1971년 당시 신민당 김대중 대통령후보가 유세에 앞서 손을 들고 있는 모습. [중앙포토]

뿐만 아니라 당시 남북 정권 간의 관계에 대해서도 예리한 지적이 나온다. "이번 사태에 가장 뜻밖인 것은 북한 측이 미리 내통하고 있는 듯하다는 점이다"(같은 해 10월 22일) "남북적십자 평양 회담이 열리고 북한에서도 남한과 보조를 맞추어 헌법 개정을 한다고 한다. 아무래도 남북 간 사태의 배후에 무엇이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을 금할 길이 없다"(같은 해 10월 24일)

일기에는 한국의 상황, 미국과 일본에서 정치인·지식인·언론인 등을 만나고 강연·기고 등의 활동을 펼친 매일의 기록 등과 함께 가족과 동지를 생각하며 괴로운 심경, 나라와 국민을 위한 기도, 스스로를 향한 다짐도 실려 있다. 책을 펴낸 한길사 김언호 대표는 "굉장히 객관적인 서술과 이성적인 사태 인식 한편에서 기도문에는 가슴에 타오르는 격정을 표현해 놓았다"며 "시적이고 문예적"이라고 말했다.
'김대중 망명일기'의 원문이 담긴 수첩. [사진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수첩 속지에 친필로 쓰여진 본래 제목은 '먕향일기'. 박명림 관장은 "개인 김대중으로는 고국을 그리워하는 망향의 기록일 수 있지만, 공인 김대중으로서는 공동체의 상황과 연결된 공적인 망명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토론을 거쳐 제목을 '망명일기'로 했다"고 전했다. 김홍걸 이사장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기록물과 관련해 "아직 공개되지 않았지만 대통령 재임 중에 매일의 할 일 등을 기록한 '국정일기'도 거의 30권 분량이 있다"고 전했다.

"운명대로 사는 수밖에 없겠지. 자기 소신대로 살다가 죽는 거지. 인생만사가 새옹지마인데 결국은 무엇이 행복이 될지 누가 아는가. 나는 조국과 나의 사랑하는 동포를 위해서 싸우다 쓰러진 패자는 될망정 독재와 불의 속에 영화를 누리는 승자의 길은 택하지 않을 것이다."이 역시 1972년 10월 17일 일기 내용이다.



이후남([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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