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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혜의 마음 읽기] 일 잘하는 사람

중앙일보

2025.07.22 08:16 2025.07.22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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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
“좋은 것은 야무진 것, 계속 견디는 것, 상태를 잘 유지하는 것이다. 마음이 좋지만 통찰력과 추진력이 없는 사람을 뜻하는 말과는 구분된다.” 이건 하이데거가 한 말로, 일 잘하는 사람에 대한 정의라고도 할 수 있다. 내가 만난 이들 중 야무지고 끊임없이 견디며 누구보다 좋은 상태를 견지하는 사람은 바로 『악녀서』를 쓴 천쉐다. 작가가 일을 잘한다는 것은 하나의 상황에 대해 열 가지 다른 언어로 말할 줄 아는 것이다. 얼마 전 국제도서전 때 방한해 10여 군데 매체와 인터뷰하며 기자들이 상식의 언저리에서 동일한 물음을 던질 때 그는 말을 조금씩 바꿨다. 말의 결을 달리할 줄 아는 것, 이것은 작가의 양심과 기술의 문제다.

작가든 독자든 어떤 직종이든
야무지고 부분·전체 함께 봐야
시간은 노력을 배반하지 않아

김지윤 기자
그 힘의 밑바탕에는 신체 관리와 감정 정돈이 있다. 앞엣것은 식이요법과 운동으로 다스릴 수 있지만, 감정 정돈은 난도가 높다. 글은 자기감정을 통제할 때 쓰일 수 있고, 따라서 관계의 양을 덜어내며 질적으로 가다듬는 것은 필수다. 천쉐는 어릴 적 부모의 다툼과 가난으로부터 얻은 고통 때문에 현실과 도피(환상) 사이를 오갔고, 연애하면서 생긴 상처 또한 매우 깊었다. 기억은 유령이 되어 그녀의 머리채를 잡았다. 이런 경우 기억의 재사유가 구원의 밧줄인데, 이 과정을 잘 거치면 삶의 질곡은 ‘역사’로서의 자리를 얻기도 한다. 천쉐는 마침내 생활의 안정을 담보해줄 파트너와의 관계로 안착했고, 지금은 그것이 글쓰기를 지탱하는 비법이 되고 있다.

그렇다면 일 잘하는 편집자는 어떤 사람일까. 편집자는 남의 글에 손을 댄다. 글에서 문법은 기본 바탕이지만 종종 함정이 되기도 한다. 주술관계가 들어맞게 하고, 가독성을 높이며, 의역보다는 직역을 기준점으로 세우고, 일본어 번역투를 우리 말에 맞게 고치는 것. 이것이 요즘 세대 편집자들이 갖춘 능력이다. 문법적으로 따지자면 어떤 작가들의 문장은 아귀가 잘 맞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그걸 매만지는 순간 리듬과 운율이 어그러진다. 이럴 때는 문법보다 리듬과 운율을 지키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또한 읽기 쉬운 문장으로 고치는 것은 때로 독자가 받을 자극을 빼앗으며, ‘정확한’ 번역은 역자가 선택한 관점을 무화시키고 박탈해버릴 위험성이 있다. 그렇다 보니 편집자는 저·역자와 독자 사이에서 낀 존재가 되어, 어떤 때는 독자에게 맞추고 또 다른 때는 저·역자에게 맞추는 기술을 발휘해야 한다. 그런 기술은 자기 확신이 덜할 때 갖춰질 수 있는데, 확신은 오랜 세월 벽에 부딪혀 자아가 마모될 때라야 누그러진다. 시간은 값을 치르지 않은 채 떼어먹는 일이 없다. 거기서 대가를 얻기 때문에 우리는 시간을 좋아하고 거기에 매달린다.

일하는 사람은 어느 직종에 있든 한 템포 쉬면서 먼 산을 보듯 전체를 봐야 한다. 집중은 집적을 통해 성과를 만들어내지만, 동시에 집중하는 순간 대상에 대한 거리감을 없애 관망의 시선을 빼앗는다. 편집자가 매일 공부하듯 원고를 읽어도 그것이 대개 공부가 되지 못하는 이유다. 원고 편집은 종종 사고를 편협하게 몰고 간다. 저자의 글에 자기 관점을 최대한 밀착하면서 그대로 흡수하고, 마케팅 감각을 발휘해 타깃 독자를 염두에 둔 읽기에는 이미 계산이 들어서 있다. 계산이 가장 손쉽게 앗아가는 것은 비평 감각이다. 그들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면서 때로 그 손가락이 아름답다고 생각하곤 한다.

편집자들은 주류 시장의 가장 목 좋은 곳을 차지하려고 애면글면하면서도 다른 한편 반자본주의적 관점을 체득해 인문학 정신이 몸에 배어 있기도 하다. 어쨌거나 저자와 편집자가 일을 잘한다는 것은 주류의 흐름, 관점, 기법에 지나치게 오염되지 않는 것인데, 왜냐하면 주류는 상식을 벗어나지 않도록 권유하며, 상식에 젖는 순간 글은 생명력을 잃기 때문이다.

저자가 ‘야무진’ 것은 정신의 탑을 언어로 쌓는 것이다. 그러려면 양을 질로 전환하는 과제를 끊임없이 수행해야 한다. 여기에 자양분이 되어주는 것이 이론이고, 다행히 획기적인 철학자나 사상가들이 앞 시대를 근본부터 뒤흔드는 이론과 체계를 마련해주곤 한다.

일 잘하는 독자라는 개념도 성립될 수 있을까. 저자와 편집자는 책으로 돈을 버니 직업이랄 수 있지만 독자는 그렇지 않다. 하지만 독자군의 한 모서리를 차지하는 것이 저자와 편집자들이며, 일반 독자 역시 책에서 유희만이 아니라 지식과 태도 등 일에 활용할 아이디어와 기술을 얻는다. 책을 생산하지 않는 일반 독자들이 소비자로 전락하지 않는 한 아마 비평적 지위를 가장 확고하게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간접적인 영역에서 간접의 언어를 구사하며 ‘시대정신’을 간취해내는 독자들은 자기 직업과 생활에서 프로페셔널한 감각을 발휘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게 정신이 이뤄내는 가장 고차원적인 일일 수 있다.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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