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에 진출한 한국 기업이 최근 직면한 최대 고민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세 폭탄 때문이다. 아세안 국가별 관세율은 천차만별이다. 베트남과 인도네시아는 최종 합의를 통해 관세율을 각각 46%에서 20%로, 32%에서 19%로 낮췄지만, 캄보디아(36%)와 라오스(40%)는 여전히 높다. 태국은 36%, 말레이시아는 25%로 협상 중이며 8월 1일까지 협상 완료 압박을 받고 있다.
동남아 국가별 관세율 제각각
인력·공급망 확보 비용 따지면
아세안 생산 생태계 만들어야
그러나 관세율 차이만 보고 생산 거점을 옮기는 것은 섣부른 결정이 될 수 있다. 트럼프의 관세는 아세안만 겨냥하지 않는다. 한국·일본(25%), 유럽연합(EU·30%), 멕시코(30%), 캐나다(35%), 브라질(50%), 중국(55%) 등 주요 경제권 대부분이 타깃이다. 모든 무역 품목에 10% 기본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방침까지 고려하면, 전 세계가 관세 대상이다.
베트남과 인도네시아에 적용되는 20% 내외의 관세율은 결코 낮은 수치가 아니다. 미국산 농산물 29억 달러와 보잉 항공기 50대(80억 달러), 에너지 150억 달러 구매, 대미 수입 무관세 등 막대한 경제적 대가를 지불한 결과다. 물론 그럼에도 이 관세율이 상대적 경쟁력을 갖는다는 것이 역설적인 현실이다.
관세율보다 주목해야 할 부분은 불확실성 해소다. 베트남 증시의 VN 지수는 지난 4월 관세 협상 이슈 당시 1094.3포인트로 저점을 기록한 뒤, 미국과의 관세 인하 협상과 외국인 자금 유입 등으로 지난 21일 1507포인트까지 37.7% 상승했다. 외국인 투자자가 한 달간 약 2억 달러를 순매수했다. 시장은 관세율이 ‘얼마냐’보다 ‘확정됐는지’를 더 중요하게 본 것이다.
트럼프식 외교의 본질은 ‘누가 우방이냐’가 아닌 ‘무엇을 주고받았느냐’에 있다. 베트남과 인도네시아의 사례가 이를 증명한다. 반면 미국과 전통적 우호 관계를 강조했던 태국은 대미 무역 흑자 감축 제안에도 불구하고 아직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중국 없는 공급망’ 구축이 대안 이러한 ‘거래의 정치학’은 아세안의 자율성을 흔든다. 미국은 아세안 전체보다 개별국을 상대로 한 ‘각개격파’ 협상에 집중하고 있다. 아세안은 트럼프 행정부의 전략적 우선순위 밖에 있다. 베트남과 협상에서는 관세율을 11%로 합의했지만 20%로 일방 발표했고, 글로벌 사우스를 꺼리면서도 브릭스(BRICs)에 가입한 인도네시아와는 19%로 타결했다. 일관성보다 본인 계산이 우선인 셈이다. 말레이시아 대사에 극우 인사를 지명한 결정도 이런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글로벌 공급망을 뒤흔드는 트럼프의 관세 정책에 한국 기업은 단순한 생산 비용 계산을 넘어 관세율과 원산지 규정, 부품 조달망까지 동시에 고려해야 하는 복잡한 상황에 직면했다. 특히 중국산 환적 상품에 대한 40% 고율 관세 부과는 한국 기업에도 위협이다.
그럼에도 성급한 공장 이전은 해답이 아니다. 첫째, 관세 폭풍은 어느 한 나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전 세계 관세 지도를 보면 한국(25%)과 멕시코(30%), 캐나다(35%) 등 어느 나라를 택해도 관세 부담을 피할 수 없다. 특히 멕시코·인도·방글라데시에 적용되는 관세율이 높아지면, 오히려 베트남·인도네시아가 상대적으로 유리할 수 있다.
둘째, 관세 외에도 고려할 비용이 많다. 공장 이전이나 숙련 인력 재확보, 기존 협력업체 네트워크 해체와 재구축까지 보이지 않는 비용도 막대하다. 지역에서 품질 안정화를 이룰 때까지 들어갈 시간과 노력 등을 감안하면 높아진 관세보다 훨씬 큰 손실을 감수해야 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해법은 무엇일까. 부품 조달 등에 있어 중국 의존도를 줄이고 현지 기업을 키우거나, 중국 기업의 빈자리를 한국 기업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현지 부품 조달 비율을 50% 이상으로 높이면 원산지 기준을 충족하면서도 관세 리스크를 크게 줄일 수 있다. 현지 협력업체를 발굴하고 육성해 ‘중국 없는’ 공급망을 구축하는 것이 공장 이전보다 훨씬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기업 혼자서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한국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절실하다. 미국이 중국산 부품 확인을 위한 추적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는 만큼,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등이 이에 잘 대응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결국 우리 기업에 유리하다.
현지 규제, 한국 기준 부합하게 해야 원산지 추적 시스템과 부품업체 육성에 한국이 협력하면 일석이조다. 아세안 국가의 기술규제(TBT)와 위생검역조치(SPS) 대응 역시 마찬가지다. 베트남이 한국과 유사한 규제 체계를 갖춘 것처럼, 새롭게 부상하는 미래산업 부문에서도 한국 기준에 맞춰 규제가 수립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관세 전쟁이 꼭 위기만은 아니다. 한국 기업이 아세안에서 더 깊이 뿌리내릴 기회가 될 수 있다. 동남아 제조업이 대미 수출을 늘리면 중간재 수입도 함께 증가하는데, 기존에는 이를 한국과 중국에서 주로 조달했다. 하지만 중국산 부품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면서 중국이 빠진 자리를 한국이 채울 기회가 커지고 있다.
관세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핵심은 ‘메이드 인 아세안(Made in ASEAN)’이 아닌 ‘아세안에 있는 한국 기업이 만드는 것(Made by Korea in ASEAN)’이다. 비용과 시간을 고려하면 관세를 피해 공장을 옮기는 것보다 아세안 현지 협력업체를 키워 자체 생태계를 조성하는 것이 더 전략적일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불확실성 속에서도 지속 가능한 해법이다. 진짜 승부는 이제부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