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는 인류의 경제생활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진화해 왔다. 농경에서 산업, 다시 디지털 시대로의 전환 속에서 화폐 역시 금속, 지폐, 전자화폐를 거쳤다. 디지털 전환의 가속화는 이제 또 다른 화폐의 등장을 요구한다. 그 해답 중 하나가 스테이블코인(stablecoin)이다.
미국에서는 트럼프 행정부가 미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이 대규모의 국채 수요를 창출해 낼 수 있다며 스테이블코인을 띄우더니, 최근에는 스테이블코인을 제도권 안에서 규제하는 지니어스(Genius)법이 의회를 통과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지난 대선 당시 이재명 후보가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의 제도화를 공약으로 내걸었다. 국회에서는 지난 6월 민병덕 의원이 대선 공약을 추진하기 위해 ‘디지털 자산기본법’을 대표 발의하고, 이를 토대로 안도걸 의원이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의 발행/운영 법률’을 제안했다.
디지털 시대 차세대 화폐로 주목
안정성 내세우지만 위험은 엄존
단계별 도입 등 신중한 접근 필요
중앙은행이 논의의 중심에 서야
스테이블코인이란 말 그대로 ‘가치가 안정된 디지털 화폐’이다. 비트코인처럼 가격이 하루에도 수십 퍼센트씩 오르내리는 암호자산과 달리, 법정화폐 (원화·달러 등)와 1대1로 연동되도록 설계된 것이다. 가령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 ‘테더(Tether)’ 1개는 언제나 1달러의 가치를 유지하며, 필요하면 실제 달러로 교환할 수 있다. 이처럼 가격이 안정적인 스테이블코인은 가상자산 시장에서 결제·송금과 같은 거래수단으로 쓰이기에 적합하고, 블록체인 기술 덕분에 실시간 정산·수수료 절감 효과도 기대할 수 있어 디지털 시대의 차세대 화폐로 주목받는다.
그렇다면 스테이블코인의 가격 안정성은 어떻게 확보될까? 가장 단순한 방법은 발행사가 동일 규모의 준비금을 예치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10억 달러어치 코인을 발행했다면, 받은 현금 10억 달러를 금융기관에 보관해 두는 식이다. 이로써 이용자는 자신이 보유한 코인을 언제든 동일 가액의 달러로 교환할 수 있다는 신뢰를 확보하게 된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대부분 스테이블코인 발행사가 달러 현금 대신 단기 국채나 기업어음 같은 고유동성·수익성 자산을 준비금으로 운용할 수 있다. 그래서 이들의 자산 가치가 급락하거나, 준비금 존재 여부가 투명하게 공시되지 않으면 ‘1코인=1달러’라는 신뢰가 흔들릴 수 있다.
스테이블코인이 디지털 시대의 지급결제 혁신을 이끌 것이라는 기대 속에서도 그 잠재적 위험은 19세기 중반 미국의 ‘자유은행(free banking)’ 시기를 돌아보면 분명해진다. 당시 미국에서는 누구나 최소한의 자본만 갖추면 은행을 설립하고, 담보자산을 예치하는 조건으로 지폐를 발행할 수 있었다. 이것은 은행, 비은행 구분 없이 미국 국채를 준비자산으로 보유하면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허용하는 ‘지니어스법’과 매우 유사하다. 그때 일부 은행은 충분한 준비금도 없이 과도하게 지폐를 찍어냈다. 결과는 뱅크런과 도미노 파산, 그리고 예금자·지폐 보유자가 떠안은 대규모 손실이었다.
이 역사적 사례는 오늘날 스테이블코인이 충분한 규제·감독 없이 난립할 경우 ‘코인런’과 유동성 위기가 발생할 수 있음을 경고한다.
우리나라가 혁신과 안정을 모두 담보하는 스테이블코인 체계를 구축하려면, 단계적 접근이 필요하다. 우선, 은행이 보유 예금을 디지털화한 ‘예금토큰’ 형태로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하도록 하는 방안이다. 한국은행도 이미 기관용 중앙은행 디지털 화폐(CBDC) 파일럿에서 예금토큰의 활용 가능성을 시험한 적이 있다. 은행 부문은 자본규제·지급준비·예금보험 등 안전망이 갖춰져 있어 초기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다.
향후 제도가 안착한 뒤에는 빅테크 등 비은행 사업자에게도 발행권을 단계적으로 개방하되, ‘동일 기능, 동일 규제’ 원칙에 따라 은행에 준하는 감독·준비금 요건을 적용해야 한다. 이렇게 ‘은행 → 비은행’ 순으로 문을 열면 금융안정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경쟁과 혁신을 유도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러한 순차적 허용이 실효성을 가지려면 정부·한국은행은 은행권의 결제·송금 수수료 인하 등 지급결제 혁신을 지속적으로 유도해야 한다.
스테이블코인의 발행과 감독은 기술·산업 차원을 넘어 통화가치에 대한 신뢰와 금융안정을 좌우하는 국가 책무이므로, 논의의 중심에는 반드시 한국은행이 서야 한다. 그러나 현재 국회에 발의된 법안들은 한국은행을 인가 체계 밖으로 밀어내거나, 협의에 그치는 보조적 역할로 제한하고 있다. 스테이블코인이 초래할 수 있는 금융시스템 불안정을 방지하려면, 중앙은행이 법정화폐의 기준과 질서를 책임지는 핵심 기관으로서 확고한 권한을 가져야 한다. 한국은행이, ‘재무부의 남대문 출장소’라는 과거의 냉소를 다시 불러오지 않기 위해서라도, 독립된 중앙은행의 책무 수행을 위해 스테이블코인 법안 논의를 관망만 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선도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