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현지시간) 미국
CNN이 이런 보도를 했다. 그러면서 한국의 폴란드 무기 수출을 사례로 꼽았다. 폴란드는 2022년 한국과 K2 전차 1000대, K9 자주포 696문, FA-50 경공격기 48대, K239 천무 다연장로켓 290문 공급을 계약했다. 각종 부품 지원 등을 포함해 20조원 규모였다. 미국의 싱크탱크인
스팀슨센터는 지난해 한국의 방위산업에 대해 공급망ㆍ기술ㆍ조선 등 분야에서 한ㆍ미 협력을 확대할 수 있으며, 미국은 한국의 방산을 전략적 자산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처럼 요즘 잘 나가는 대한민국 방산이 처음부터 화려했던 건 아니었다. 시작은 오히려 무모하기까지 했다. 1971년 11월 10일 박정희 대통령은 김정렴 비서실장을 통해 국방과학연구소(ADD)에 ‘긴급 병기개발 지시’를 내렸다.
" “M2 카빈, M1 소총, M1919A4ㆍA6 기관총, 60㎜ 박격포, 81㎜ 박격포, 3.5인치 로켓포, 수류탄, 대전차지뢰. 12월 30일까지 전부 만들어 와라.” "
박 대통령은 “처음 만든 무기는 총구가 갈라져도 좋으니 시제품부터 만들고, 차차 개량해나가면서 쓸만한 병기를 생산하라”고 덧붙였다.
주어진 시간은 단 50일. 하지만 총포는 고사하고 대검 하나 만들지 못했던 게 당시 현실이었다. 소총 총구를 청소하는 ‘꽂을대’마저 미국의 군사원조에 의존하던 때였다. 기술은커녕 장비ㆍ설비도 부족했다. 사업명 ‘번개사업’에는 ‘번갯불에 콩 볶는 식’이라는 과학자들의 속마음이 배어 있었다(조영길 『자주국방의 길』).
박 대통령이 무리한 요구를 한 배경엔 그 무렵 엄혹한 안보 현실이 있었다. 북한 특수부대가 청와대를 습격한 68년 1ㆍ21 사태와 울진ㆍ삼척 무장공비 침투, 69년 미군 EC-121 조기경보기를 북한이 격추해 승무원 31명이 전원 사망한 사건 등 무력도발이 기승을 부렸다. 그 와중에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은 69년 7월 25일 “미국의 동맹국은 자국의 방위를 위한 일차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닉슨 독트린’을 발표했다. 이어 70년 7월 5일 미국은 주한미군 7사단 철수 사실을 일방적으로 알렸다. 자주국방은 한국 생존의 필요조건이 됐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ADD는 밤낮으로 소총과 박격포를 개발했다. 설계도면이 전혀 없어 무기를 분해한 뒤 치수를 재 도면을 그리는 역설계에 의존했다. 미국 무기 교범을 찾으러 청계천 헌책방도 뒤졌다.
대통령의 지시 시한을 2주 앞당긴 71년 12월 16일, 마침내 국산 무기 시제품 8종이 청와대 대접견실에 공개됐다. 박 대통령은 환히 웃으며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12월 26일 중공업 발전을 담당하는 오원철 청와대 경제2수석을 불렀다. “우리도 평양을 때릴 수 있는 유도탄을 개발하자.” 미사일 개발 사업은 비밀리에 추진하고자 ‘항공공업 육성 계획’으로 불렸다.
번개사업으로 정신없던 ADD엔 난리가 났다. 개발팀을 꾸리고 인재들을 모았다. 해외에서 들어오는 연구원에겐 이사 비용과 사택, 자가용까지 줬다. ADD 연구원으로 근무하면 병역을 면제해주는 특례보충역 제도도 이때 만들어졌다.
73년 1월 12일 박정희 전 대통령은 연두 기자회견에서 중화학공업 육성에 중점을 두겠다고 밝혔다. 채우석 방위산업학회 이사장은 “기계ㆍ화학ㆍ철강ㆍ조선업 등 중공업은 방산이 싹을 틔우고 자라는 토양과 같다. 다른 국가에서도 방산 육성을 꾀했지만, 중공업 기반이 약해 대부분 실패했다”며 “한국은 80년대 전기ㆍ전자 산업도 키워 방산이 더 발전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박 대통령은 틈만 나면 대전기계창(지금의 ADD)을 찾아 유도탄 개발 상황을 둘러봤다. 76년 취임한 미국의 지미 카터 대통령은 주한미군 지상군을 82년까지 철수할 계획을 세웠다. 시간이 촉박했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한겨울에도 시험을 강행했다. 이때 눈보라를 맞으며 걸어가는 연구원들의 모습이 북극곰을 닮았다고 해서 국산 미사일의 별칭은 ‘백곰’이 됐다. 78년 9월 26일 백곰은 공개 시험 발사에 성공했다.
백곰과 함께 ‘불곰’이 한국의 방산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러시아는 한국이 빌려준 돈 일부를 무기로 상환했다. 이게 ‘불곰사업(1995~2007년)’이었다. 투박하지만 튼튼한 러시아 무기를 굴리면서 얻은 지식과 노하우는 무기 개발에 반영됐다. 그래서 한국 무기는 미국 무기(첨단ㆍ정밀성)와 러시아제(간편성ㆍ내구성)의 장점을 잘 섞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K9 자주포는 K방산의 도약대였다. 98년 개발을 끝내고 3년 만인 2001년 튀르키예로 수출됐다. 외환위기 때문에 99년도 국방 예산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전년도보다 깎였다. K9의 육군 납품 대수가 확 줄었다. 그래서 생산업체인 삼성테크윈(현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은 적극적으로 수출길을 뚫어야 했다. 2025년 7월 현재 K9은 9개국에 1690대가 팔렸다.
K9은 특히 2016년 1월 노르웨이가 실시한 비교 시험에서 성능을 발휘했다. K9과 독일 PzH2000을 북극과 가까운 군 기지에서 비교 평가했다. 독일 자주포는 눈길 기동성 평가에서 ‘그르렁 그르렁’ 소리를 요란하게 내더니 바로 시동이 꺼졌다. K9의 승리였다.
2010년대 20억~30억 달러에서 맴돌던 방산 수출액은 2021년 72억500만 달러로 확 뛰었다. 그해 12월 13일 호주와 맺은 K9 자주포 30문, K10 탄약운반 장갑차 15대의 계약이 기폭제였다. 이후 수출이 쑥쑥 늘었다. 그러면서 대표 방산업체인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시가총액은 최근 2년 새 12조8000억원에서 47조4000억원으로 270% 증가했다.
2022년 7월 19일 국산 4.5세대 전투기인 KF-21 보라매가 첫 시험 비행에 성공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2001년 3월 20일 공군사관학교 졸업식에서 “늦어도 2015년까지 최신예 국산 전투기를 개발하겠다”고 한 뒤 21년 만이었다. 미국이 핵심기술 이전을 거부했는데도 자체 개발로 돌파했다.
2022년 7월 27일은 K방산 역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폴란드와 20조원에 달하는 방산협력 계약을 체결했다. 대박을 터뜨린 셈이었다. 그해 2월 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계기였다. 러시아와 가까운 폴란드는 군사력 강화에 나섰다. 폴란드가 처음 고려했던 독일은 탈냉전 이후 방산 생태계가 무너져 납기를 맞추기 어려웠다. 북한과 군사적 대치 때문에 꾸준하게 무기를 개발ㆍ생산ㆍ배치한 한국에 폴란드는 기회의 땅이었다.
끈질긴 세일즈도 폴란드 대박에 한몫했다. 2021년 9월 ‘폴란드가 전차를 구한다’는 소문을 듣자마자 방위사업청 관계자가 바로 폴란드로 날아갔다. 이듬해 계약까지 1년도 안 되는 기간 중 이 관계자는 폴란드를 13번 찾았다.
강은호 전 방사청장(전북대 특임교수)은 “후발 주자이다 보니 방산뿐 아니라 상대국이 원하는 다른 분야의 협력까지 제공하는 맞춤형 마케팅을 펼쳤다”고 설명했다. 2022년 문화재청이 이집트 국가유물최고위원회와 룩소르 라메세움 신전 복원과 6개 박물관 소장 유물 디지털화에 협력하기로 한 게 대표적이다. 이집트가 필요로 하는 사업에 공적개발원조(ODA)를 준 것이다. 당시 한국은 이집트에 K9을 판매하려고 했고, 방사청과 문화재청이 합심했다. 결국 이집트는 K9 200문을 계약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한국을 ‘방산 4대 강국’으로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앞으로 K방산에겐 꽃길만 펼쳐진 게 아니다. 무엇보다 선진국의 견제가 심해졌다. 특히 독일ㆍ프랑스는 안방인 유럽을 내주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강 전 청장은 “방산은 전형적인 GtoG(정부 대 정부) 사업”이라며 “이 대통령이 신설하겠다고 한 방산 컨트롤타워를 빨리 꾸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선진국 시장, 특히 미국 시장을 반드시 확보해야 한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