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22일(현지시간) 미국과 관세 협상을 마무리함에 따라, 막판 총력전에 돌입한 한국은 어떤 결과를 끌어낼지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일각에선 아직 성사되지 않은 정상회담에서 담판을 지을 수 있다는 관측도 있지만, 섣부른 회담에 대한 우려도 적지 않다. 당장 이날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필리핀 대통령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직접 만나고도 관세를 1%포인트밖에 낮추지 못하고 귀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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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하게 날아왔지만…성과는 1% 조정
트럼프 대통령은 일본과의 관세 타결 발표 6시간 전 자신의 소설미디어(SNS)에 “필리핀이 미국에 시장을 개방하고 관세를 제로(0)로 하는 무역협상을 타결했다”며 “반면 필리핀은 (미국에) 19%의 관세를 지불할 것”이라고 적었다.
필리핀의 입장에선 20% 관세 서한을 받자마자, 자국 대통령이 직접 미국으로 날아갔는데도 관세를 1%포인트 낮추는 데 그친 수모를 겪은 셈이다. 19% 관세율은 지난 4월 공지됐던 17%보다도 높다. 페르디난드 대통령은 자신을 마치 병풍처럼 앉혀 놓고 미국 기자들과 국내 정치 사안을 논의하는 트럼프 대통령 특유의 굴욕적 기자회견까지 감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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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맹 내세우자…“나 아니면 대통령 아닐 수도”
페르디난드 대통령은 이날 회담에서 미국과의 동맹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필리핀은 이슬람국가(ISIS·근본주의 테러조직)와 테러리스트로 가득 차 있었지만, 내 재임 기간 그들을 완전히 소탕했다”며 “만약 내가 개입하지 않았다면 현재 누가 당신(필리핀)의 대통령일지 알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통상 양 정상의 모두 발언만 공개되는 정상회담과 달리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에도 40분 가까이 기자들의 질문을 받으며 회담을 생방송 TV쇼 형식으로 진행했다. 기자들은 미국 국내 문제에 대해서만 질문했고, 필리핀 정상은 발언 기회도 얻지 못하고 가만히 앉아 미국 국내 정치 사안에 대한 논쟁을 지켜봐야 했다.
어렵게 기회를 얻은 소수 필리핀 기자들이 관세에 대해 물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그 때마다 “당신은 필리핀 기자인가”라고 물은 뒤 “그가 너무 강경해서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거나 “사실 나는 지금보다는 이전에 그를 더 좋아했었다”는 조롱 섞인 말로 일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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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의는 했지만…日 총리도 거쳤던 굴욕
이날 합의를 이끌어낸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일본 총리 역시 정상회담에서 굴욕을 겪었다. 이시바 총리는 트럼프 취임 직후인 2월에 이어 지난달 캐나다에서 열린 G7(주요 7개국) 정상회의 때도 트럼프 대통령과 만났다. 일본은 동맹 관계를 내세워 관세 협상을 자신했지만 정상회담 이후 기존의 24%보다 1%포인트 높아진 25%가 적힌 ‘관세 서한’을 받았다.
특히 지난달 G7을 계기로 한 회담 뒤부터 트럼프 대통령은 “일본은 매우 잘못 길들여졌다(very spoiled)”는 등의 막말을 퍼부으며 일본을 압박했다. 지난 20일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있던 이시바 총리는 “심히 유감스럽다”며 강한 대응을 했고, 특히 쌀에 대해서 “농업을 희생하는 어떠한 일도 없을 것”이라고 맞섰다.
그럼에도 이시바 총리는 선거에서 참패하며 정치적 위기에 몰렸다. 그리고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SNS에 일본과의 관세 협상 타결 소식을 일방적으로 공개하며 “일본이 쌀과 특정 농산물을 포함한 무역을 개방한다”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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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담 확대…자동차·쌀·에너지 등 난제
일본의 협상 결과는 한국에는 부담 요인이다. 일본이 상호관세를 25%에서 15%로 낮추면서 한국에도 협상의 여지가 있다는 점이 확인됐지만, 핵심 동맹국에도 15%라는 낮지 않은 관세가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이 동시에 확인됐다.
특히 일본은 미국이 불가 입장을 굽히지 않던 자동차 품목관세를 25%에서 12.5%로 낮추는 대신 사수를 외치던 쌀시장을 내줬다. 외교소식통은 “한국이 자동차 관세를 낮추지 못할 경우 최대 대미 수출품인 자동차 시장이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고, 그렇다고 쌀 시장을 개방할 경우 정부가 정치적 위기에 몰리게 될 것”이라며 “미·일 협상의 구체적인 사안을 면밀히 분석할 필요가 있다”고 전했다.
또 일본이 투자하기로 한 5500억 달러(약 759조원)가 알래스카 액화천연가스(LNG) 개발에 투입될 경우 한국도 같은 요구를 받을 수 있다. 알래스카 액화천연가스(LNG) 개발은 사업성이 불투명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방미 기간 더그 버검 국가에너지위원회 의장 겸 내무부 장관, 크리스 라이트 에너지장관, 하워드 러트닉 상무부 장관 등을 면담할 예정이다.
이날 공개된 미국과 인도네시아의 협상 세부안도 한국에 시사점을 준다. 인도네시아는 상호관세를 기존의 32%에서 19%로 낮추는 대가로 미국산 자동차와 농산물, 의약품에 대한 사실상 모든 규제 적용을 면제했다. 또 데이터 유통에 따른 과세를 중단하기로 했다. 자동차 비관세 장벽 폐지, 농산물 개방, 플랫폼법 폐지 등 미국이 한국에 요구하고 있는 사안과 대부분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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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관 건너 뛴 정상회담은 좋지 않다”
외교가에선 일찍부터 “정치적 결단이 필요한 사안들이 쟁점이 되면서 결국 대통령이 나설 수밖에 없다”는 주장과 캐나다·일본처럼 정상이 나섰다가 고관세를 통보받은 전례를 이유로 “성급한 회담은 위험하다”는 의견이 엇갈려왔다.
이와 관련 트럼프 1기 행정부 때 미국무역대표부(USTR) 대표 대행을 지냈던 스티븐 본 변호사는 이날 워싱턴 특파원단과 만난 자리에서 “협상은 보통 장관급에서 합의할 수 있는 내용을 파악한 뒤에 어려운 쟁점을 대통령에게 가지고 간다”며 “절차를 건너뛰려는 시도는 통상 좋은 생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