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닫기

"일본 먼저 합의, 관세 유예 명분없다"...'벼랑 끝' 협상 벌어야하는 한국

중앙일보

2025.07.23 02:06 2025.07.23 03:09

  • 글자크기
  • 인쇄
  • 공유
기사 공유
도널트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 EPA=연합뉴스

일본이 23일 미국이 부과한 25% 상호관세를 15%로 내리는 무역 합의에 성공하면서 한국의 부담이 더 커졌다. 한국과 일본은 글로벌 시장에서 수출 경쟁국인데다, 대미 수출 품목과 규모가 비슷해 관세율 차이에 서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어서다. 한국 정부는 오는 25일부터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여한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이 참석하는 ‘2+2 협의’와 통상·경제·안보를 아우르는 막판 협상에서 사실상 결론을 지어야할 상황에 몰렸다.

이날 주요 외신 등에 따르면 일본은 ▶5500억 달러(약 760조원) 투자 ▶쌀 등 일부 농산물과 자동차·트럭 시장 개방 ▶알래스카 LNG(액화천연가스) 프로젝트 투자 참여 등을 제한해 상호관세 인하에 성공한 것으로 전해졌다. 익명을 요청한 통상전문가는 “협상 기간이 짧았던 한국 정부는 다음달 1일로 예정된 상호관세 부과의 연장을 바랐는데, 일본이 먼저 합의에 성공하면서 이를 요구할 명분이 사라졌다"며 “일본이 제시한 수준 이상을 제시해야 하는 부담감까지 안게 됐다”고 분석했다.

차준홍 기자

이번 미·일 무역 협정의 핵심은 일본이 약정한 5500억 달러 규모의 투자다. 반도체·의약품·조선 등 경제안보 분야에서 일본 기업의 대미 투자를 촉진하는 것으로, 투자 계획의 명칭은 ‘재팬 인베스트먼트 이니셔티브’인 것으로 전해졌다. 외신 등에 따르면 이 같은 투자 계획은 지난 5월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이 스콧 베센트 재무장관에게 처음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3000억달러 규모의 ‘미·일 소버린 펀드(국부펀드)’를 조성하는 방식이다. 협상 과정에서 투자 규모가 4000억 달러 수준까지 높아졌고, 최종적으로 5500억 달러까지 확대했다.

투자의 구체적인 형태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는 “정부계 금융기관이 출자·융자·융자보증을 제공하는 것에 합의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JBIC(일본국제협력은행)와 일본무역보험을 활용하는 방안을 생각하고 있으며 정부는 이들 기관의 자본 강화를 위해 필요한 조치를 강구할 것이라고 부연했다. 일본 기업이 미국에 진출하거나 미국 기업이 사업을 벌일 때 일본의 금융권 대출(보증)을 받아 집행하는 방식을 예상해볼 수 있다.

재원 마련에는 민간도 참여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과거 아베 총리 시절(2013~2020년) 일본이 미국에 인프라·에너지 투자를 진행한 사례를 보면, JBIC 등 정책금융기관이 공적자금을 출연하고, 여기에 시중은행과 민간기업이 참여하는 방식이었다.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은 이달 초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일본과 비슷한 규모의 투자 펀드 조성방안을 요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기준으로 4000억 달러(약 550조원) 수준이다. 일반적으로 정부 주도의 해외 투자가 진행될 경우 산업은행·수출입은행 등 정책기관이 핵심 투자자 역할을 하는데, 대기업·금융기관·연기금 등이 출자하는 펀드로 추가 자금을 조성하기도 한다. 300조원(지난해 말 기준)인 대한투자공사(KIC)의 국부펀드를 활용하는 방안도 거론된다. 리스크 관리 차원에서 투자 프로젝트별로 재원을 집행할 가능성도 있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15일 서울 한남동 관저에서 구광모 LG그룹 회장과 만찬회동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재계 총수와의 만찬 회동 자리에서 이 대통령은 대미 투자와 글로벌 통상, 지방 활성화 방안, 연구개발(R&D) 투자 및 미래사회 대응 계획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의견과 애로사항을 청취했다. (대통령실 제공. 재판매 및 DB금지) 2025.7.18/뉴스1

이재명 대통령이 최근 구광모 LG그룹, 정의선 현대차 그룹 총수와 잇달아 회동했는데, 미국이 요청한 투자에 관해 논의했을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강성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정부가 정책금융, 연기금 등을 통해 일부 지원할 수도 있겠지만, 직접 재원을 마련해 투자하는 방식은 제한적일 것으로 보인다”며“결국 정부가 민간 기업들의 투자를 유인하면서 기업들이 나서는 방식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다만 기업 투자만으로 수백조원에 달하는 자금을 조달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것이란 지적도 있다. 익명을 요청한 대학교수는 “현대차는 이미 미국에 대규모 투자를 했고, 다른 기업들의 투자 여력도 크지 않아 민간 기업에서만 1000억 달러 이상을 조달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또 다른 교수는 “기업 신규투자, 미 증시 투자액, 연기금 투자, 대출·보증 등을 다 끌어모아 미국의 요구 수준을 최대한 맞추는 선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일본은 그동안 미·일 협상의 최대 난관으로 작용해 온 쌀 시장 문도 열었다.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는 “의무적으로 수입하는 최소시장접근(MMA) 물량 제도의 틀 안에서 필요한 (미국산) 쌀을 확보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국 정부는 민감도를 고려해 쌀과 소고기 시장 개방 요구를 수용할 수 없는 ‘레드라인’으로 정할 가능성이 높다. 최근 통상당국이 농축산물 시장 개방 가능성을 내비치자 농민단체와 국회 등이 거세게 반발한 영향이다. 그럼에도 일본을 비롯한 협상 타결국 모두 농산물 시장을 열었던 것에 비춰볼 때 일부 수용은 불가피할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박성훈 고려대 국제대학원 명예교수) 미국이 온라인플랫폼법, 망사용료 등 디지털 관련 규제 완화에 대한 요구도 큰 만큼 농축산물 등 다른 비관세 장벽 등과 함께 테이블에 올려놓고, 협상 지렛대로 삼아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한편 일본이 알래스카 LNG와 관련해 미국과 합작법인을 설립하기로 한 것도 한국 정부로썬 부담이다. 한국은 그동안 리스크가 큰 파이프라인 건설 등 투자에는 부정적인 입장을 보여왔다. 강문성 고려대 국제학부 교수는 “일본이 알래스카 개발에 참여하기로 한만큼, 일본과 협력 내지는 한·미·일 공동 투자 형식으로 참여를 고려해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결국 일본과 차별화한 한국의 조선·반도체·원전 등 첨단산업 협력과 국방비 증액 등 안보협력 카드가 중요해졌다. 특히 산업 협력 방안이 제조업 부활을 노리는 트럼프 대통령에 얼마나 강한 인상을 남길지가 상호관세 인하 등의 관건이 될 것으로 전망이다. 장상식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은 “일본이 미국의 무역적자국임에도 협상을 통해 가장 낮은 상호관세율(15%)을 이끌어냈고, 협상국 중 최초로 자동차 품목 관세 인하(12.5%)도 관철했다”며 “한국 정부도 7월 말까지 타결을 목표로 협상 속도를 끌어올려야 하는 상황이 됐다”고 강조했다. 이날 미국에 도착한 여한구 본부장은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려 한다”고 말했다.



김원([email protected])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