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일 일본 참의원 선거에서 참패한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총리에 대한 당내 ‘끌어내리기’ 움직임이 가속화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이시바 총리는 23일 도쿄 자민당 본부에서 아소 다로(麻生太郎),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등 3명의 전직 총리를 1시간20분간 만나 미·일 관세 합의 결과 등을 설명했다. 전직 총리를 한꺼번에 만나는 건 지극히 이례적이다.
회담 후 이시바 총리는 기자들과 만나 “회담에서 자신의 거취에 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며 사퇴를 강력히 부인했지만 여론은 냉냉하다. 이에 이시바 총리는 미국과의 관세 협상에 대한 여론의 반응 등을 보면서 거취를 판단할 것으로 보인다.
이날 3명의 전직 총리와 만난 이시바 총리는 “강한 위기감을 다 같이 공유했다. 결코 당이 분열되선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이날 일부 일본 언론에서 보도한 ‘8월 퇴진설’과 관련해 “보도내용은 사실이 아니다. 오늘 모임에서도 거취에 관한 이야기는 한번도 나오지 않았다. 일·미 합의가 확실하게 이행되도록 대응하는 것이 현재로선 매우 중요하다”며 사퇴의사가 전혀 없음을 거듭 강조했다.
이시바 총리가 그간 총리직을 유지하는 이유 중 하나로 관세협상을 들었기 때문에, 정치권에선 “관세협상 타결 후 명예롭게 퇴진하려는 것”이라는 견해가 있었다. 이시바 총리는 이날 3명의 전직 총리와의 회담을 앞두고 “미국과의 관세협상이 마무리되면서 자신의 거취를 정할 생각이냐”는 질문에 “아카자와 료세이(赤沢亮正) 경제재생상이 귀국해 상세보고를 할 것이다. 잘 검토해 나가겠다”고 말해 퇴진 가능성을 전면 부인하지는 않았다. 지지통신은 참의원 선거 결과를 마무리한 뒤 8월 퇴진할 것”이라는 자민당 간부의 발언내용을 보도했다.
━
‘총재 리콜’ 요구까지 나와
이시바 총리가 연임의사를 표명한 것과 관련해 자민당 의원들 사이에서는 공공연하게 퇴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분출하고 있다. 옛 모테기파 의원들은 22일 ‘양원 의원총회’ 개최를 요구하는 서명을 받기로 했다. 양원 의원총회는 전당대회에 버금가는 의사결정 기관으로, 당 소속 국회의원 3분의 1 이상의 요구가 있으면 개최할 수 있다. 총회가 개최되면 이 자리에서 총리 퇴진을 의결할 수도 있다. 원래 이시바 총리의 지지 기반이었던 지방 조직에서도, 속속 사임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의원내각제인 일본에는 한국의 대통령 탄핵에 해당하는 총리 파면 시스템이 없다. 대신 자민당에는 총재 리콜 규정이 있다. 자민당 당규에 따르면 당소속 국회의원과 도도부현련(지자체연맹) 대표의 과반수가 요구할 경우 총재 선거를 앞당길 수 있다. 현재 여당인 자민당 총재가 총리를 맡고 있기 때문에 조기 총재 선거가 결정되면 총리는 물러나야 한다.
━
국민 54% ‘사임해야’
자민당내에서 ‘이시바 끌어내리기’가 본격화하고 있는 배경에는 지난해 10월 중의원 선거와 지난 6월 도쿄 도의회 선거에 이은 선거 3연패에도 불구하고 총리가 물러나지 않는 상황에선 국민의 이해를 얻을 수 없다는 강한 위기감이 있다.
요미우리신문이 23일 발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총리는 사임해야 한다”는 응답이 54%나 됐다. 특히 18~39세 응답자들의 사임지지 여론은 67%에 달했다.
자민당의 정당 지지율은 2012년 정권 탈환 후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던 지난 6월보다도 4%포인트 떨어진 19%를 기록했다. 이번 참의원 선거에서 14의석을 얻어 총 15석(기존 1석)을 차지해 약진한 참정당이 지지율 12%를 기록해 그 뒤를 이었다. 3위는 국민민주당으로 지지율 11%를 기록하며 자민당을 바짝 쫓고 있다. 이날 3명의 전직 총리와의 만남 후 SNS에는 “(이시바 총리가)조기 사임해야 한다”는 의견이 빗발쳤다.
━
아베에게 사퇴 요구, 18년만에 부메랑
또 2007년 참의원 선거에서 참패한 아베 신조(安倍晋三) 당시 총리가 연임을 선언하자 “책임은 총리에게 있다” “국민은 당신이 그 자리에 있는 걸 원치 않는다”고 한 이시바 총리의 발언이 부메랑이 되고 있다. 당시 이시바 총리의 발언이 TV와 SNS를 통해 확산하면서 ‘언행불일치 총리’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옛 아베파인 니시무라 야스토시(西村康稔) 전 경제산업상은 22일 자신의 X에 “당의 재건이 급선무다. 지금 해야할 일을 할 것” “두고 보자”며 이시바 총리와 측근들을 강하게 비난했다.
현재 여소야대 상태인 중의원에서 야당이 결집해 내각 불신임안을 제출할 경우 총리는 해산하거나 내각 총사퇴를 해야 한다. 자민당 소속 중의원 의원들 입장에선 이시바 총리가 버티면서 치르는 총선만은 피해야 하는 상황이다.
━
다음 총리감 1등 다카이치
국민민주당의 다마키 유이치로(玉木雄一郎) 대표의 “이시바 정권과는 연합하지 않는다”는 발언도 관심을 끌고 있다. 선거에서 대패한 이시바 총리와는 협력하지 않지만 다른 자민당 지도자라면 협력할 수 있다는 뜻으로 풀이되기 때문이다.
요미우리신문이 23일 발표한 조사에서 차기 총리로 거론된 인물은 지난해 9월 총재 선거에서 결선투표까지 오른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전 경제안보담당상이 26%로 1위에 올랐고, 2위는 22%의 고이즈미 신지로(小泉進次郎) 농림수산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