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달 박석철(이동욱)이 시 학원에서 직접 지은 작품을 공개하자, 수강생들이 깜짝 놀란다. 가슴에 따뜻함을 품은 박석철은 시인을 꿈꿨지만, 가족을 건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건달로 살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박석철은 첫사랑 강미영(이성경)이 보는 앞에서 칼에 맞아 쓰러진다.
지난 18일 첫 방송하고 매주 금요일 밤 2회씩 연달아 방영 중인 JTBC 금요시리즈 ‘착한 사나이’의 1화 장면이다. ‘거칠게 보여도 속은 따뜻한 건달과 그의 첫사랑’이라는 1990년대 말~2000년대 초반 유행했던 드라마 설정이 2025년에 다시 등장해 눈길을 끈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옛날 서사의 툴이 그대로 살아 있다. 그만큼 이 드라마는 현재의 트렌드와는 결이 다르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JTBC가 이 작품을 편성한 건 김운경 작가의 전작인 ‘유나의 거리’(2014)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라고도 짚었다.
연출은 송해성 감독이 맡았다. 영화 ‘파이란’(2001),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2006)을 만든 송 감독의 첫 드라마 연출작이다. 그는 앞선 제작발표회에서 “제목도 요즘 쓰지 않는 사어(死語)이고, 건달이라는 직업도 1980∼90년대 느낌을 준다는 것을 알고 있다”며 “평양냉면처럼 심심하고,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지만 먹다 보면 생각나는 드라마가 되도록 노력했다”고 설명했다. 작품에 출연하는 배우 류혜영은 “촌스럽지만 그 촌스러움을 끝까지 밀고 가는 작품이라 매력을 느꼈다”고 거들었다. ‘착한 사나이’는 요즘 드라마라는 설정을 주기 위해 여주인공 강미영을 유튜버로 설정하기도 했다. 극중 유튜브 채널 ‘노래하는 작은방’을 운영한다.
이처럼 요즘 드라마에는 낯익은 서사가 새로운 조합으로 다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착한 사나이’가 옛날 드라마 감성을 복원한 사례라면, tvN ‘서초동’은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연상케 하는 구조로 시청자들에게 익숙한 느낌을 준다. 변호사들이 모여 식사하고, 고민을 나누며 감정을 다져가는 장면은 tvN ‘식샤를 합시다’의 리듬도 겹쳐 보인다. 공희정 드라마 평론가는 “‘서초동’을 보면 ‘슬기로운 변호사 생활’이란 부제가 붙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구조가 닮았다”며 “이제는 ‘슬의생’이라는 틀이 변호사뿐 아니라 교사, 공무원 등으로 확장돼 하나의 장르처럼 기능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기존의 것을 새롭게 조합하는 실험은 디즈니플러스 오리지널 시리즈 ‘파인: 촌뜨기들’에서도 이어진다. 이 작품은 1970년대 보물선 실화를 바탕으로, 사기꾼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영화 ‘밀수’(2023)의 남자판으로 느껴질 정도로 기시감이 있다. 시대극과 한탕극, 지역 로컬 서사가 겹쳐 있는 서사다.
tvN의 ‘견우와 선녀’는 로맨스와 오컬트라는 독특한 장르의 조합으로 눈길을 끈다. ‘죽을 운명의 남주인공을 여주인공이 구한다’는 설정은 지난해 신드롬급 인기를 끈 tvN ‘선재 업고 튀어’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악귀와 빙의, 주술이 얽히며 전통 로맨스의 공식에 기이한 분위기를 덧입혔다. 무당이라는 존재를 멜로의 주인공으로 내세운 점도 흥미롭다. “한국적 정서와 판타지를 연결한 독특한 장르 믹스”(정 평론가)다.
이외에도 KBS2에서 23일 첫 방송한 ‘내 여자친구는 상남자’는 제목부터 2010년대 인기작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를 떠올리게 한다. 고전적인 로맨틱 코미디의 구조를 가져와 젠더 감수성과 현실 풍자를 더하는 시도로 보인다.
공 평론가는 “사실 드라마는 어떤 소재건 ‘원형’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밖에 없다. 그런 측면에서 기시감이 드는 서사는 오히려 시청자가 쉽게 진입할 수 있는 발판이 된다”며 “이제는 그 위에 어떤 결을 얹느냐가 드라마의 경쟁력”이라고 말했다. 정 평론가 역시 “한국 드라마에서 완전히 새로운 건 이제 거의 없다. 다만 포인트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재구성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