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2001년 제너럴일렉트릭(GE)을 경영했던 잭 웰치. 취임 직후 “시장에서 1~2위 기업이 돼 투자자들에게 이익을 돌려주는 것이 회사의 최우선 목표”라는 요지의 연설을 했다. 이 연설은 자본주의 기업의 핵심 철학인 ‘주주 가치 극대화’ 운동의 기폭제가 됐다. 별다른 위기가 아닌데도 웰치는 매년 하위 10%의 직원을 해고하고, 실적 나쁜 사업장은 정리했다. 온정적이라는 평을 듣던 GE 기업문화는 ‘오징어게임장’처럼 변했고, 웰치는 ‘중성자탄 잭(Neutron Jack)’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주주들은 환호했다. GE 주가는 웰치 재임 기간 50배 이상 올랐다. 전 세계 기업에서 GE 배우기 열풍이 불었다.
주주가치 앞세우던 GE의 잭 웰치
기업 추락에 “어리석은 생각” 토로
주가 부양 위한 기업 압박은 위험
주가는 결과일 뿐 목표일 수 없어
그런 그가 글로벌 금융위기의 여파로 GE가 휘청거리기 시작한 2009년 파이낸셜타임스(FT) 인터뷰에서 다른 말을 했다. “주주 가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dumb) 아이디어.” 자신은 주주 가치라는 말을 입에 올린 적이 없으며, 주주 가치는 경영의 결과물일 뿐 목표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GE의 추락은 주주 가치로 포장한 단기 이익 집착이 누적된 결과라는 게 일반적이다. 그의 인터뷰가 반성인지, 변명인지 헛갈린다.
GE 이야기를 꺼낸 건 이재명 정부가 내건 ‘코스피 5000’의 지향점이 궁금하기 때문이다. 정부와 여당의 상법 개정 명분은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 ‘자본시장 활성화’ ‘경제 활력’ 등이다. 그러나 당장 와닿는 것은 주가 부양이다. 주가 상승과 이에 따른 지지율 호조에 고무된 듯 지금 민주당 내에는 ‘코스피5000특별위원회’ ‘디지털자산위원회’ 등이 구성됐다. 크립토(암호화폐) 1000조원 시대, 주가 5000 시대 등을 내건다. 문제는 그 방법이 기업 압박이라는 것이다. 거의 유일하게 남은 경영권 방어 수단인 자사주마저 소각을 의무화하는 등 ‘더 센 상법’ 개정안을 경쟁적으로 발의하고 있다. 오르는 주가에 개인투자자들이야 열광하겠지만 기업들은 장기 경쟁력 확보를 위한 장기 투자는 생각할 여유가 없어진다.
주가를 경제 정책의 목표로 삼는 건 위험하다. 주가는 실물경제의 거울일 뿐, 그 자체가 경제의 동력이 될 순 없다. 주가 상승이 소비를 늘리는 ‘자산효과’를 기대하지만, 실제 효과는 불확실하며 제한적이다. 자칫 ‘말보다 마차를 먼저 놓았다’는 문재인 정부 소득주도 성장의 오류를 되풀이할 수 있다.
과거 장하성, 김상조 등이 벌였던 소액주주운동은 재벌 견제라는 순기능도 있었지만 개인투자자들의 시세차익 추구 운동으로 변질된 측면이 있다. 이 틈을 타 소버린, 엘리엇, 아이칸 등 외국 행동주의 자본들의 국내 기업 경영권 위협 시도가 이어졌다. 이들은 단기 주가 상승을 노리고 기업의 장기 성장 동력을 훼손하는 요구를 서슴지 않았다.
눈앞의 주가를 위해 장기 경쟁력을 해친 기업은 GE 외에도 많다. IBM은 사업 포트폴리오를 전환하는 과정에서 단기 실적 압박에 시달렸고, 보잉은 주주 환원 정책에 집중하다 기술개발과 안전 투자를 소홀히 해 연이은 사고로 기업 이미지가 추락했다. 식품 대기업 크래프트하인즈 또한 과도한 비용 절감과 무리한 인수합병으로 브랜드 가치가 훼손되고 주가가 폭락했다. 단기 이익 추구의 폐해 사례들이다.
과거 한국의 대기업은 취약한 경영권 정당성을 보완하기 위해 대규모 채용, 해고 최소화, 사회적 기여 등의 전략을 택했다. 국가가 중재한 일종의 사회적 타협이라고 볼 수 있다. 외환위기는 이런 타협을 깨기 시작했고, 주주자본주의는 이 흐름을 가속했다. 지금 기업 압박의 목적이 채용 확대나 사회적 기여가 아니라 주주 이익 확대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물론 ‘주주자본주의=단기 이익 추구=일자리 위협’이란 구도는 너무 단순하다. 우리 기업이 배당과 주주가치 제고에 인색했다는 지적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주가 부양을 위해 기업을 압박하는 행태가 주주 외 다른 기업 이해 관계자들에게도 반드시 유리할까. 주주 가치를 내걸고 해외로 아예 본사를 옮기겠다는 기업이 나오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그 탈출구조차 법으로 막아둘 건가. 가능하지도 않고 현명하지도 않다.
대부분의 ‘개미’(개인투자자)들은 노동자다. 그런 만큼 주주 가치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오징어게임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일은 원치 않을 것이다. ‘왕개미’를 자처한 이재명 대통령도 이런 식의 주주자본주의를 바라진 않을 것이다. 중요한 건 균형이다. 국가와 기업 간 타협 모델의 장점을 살리면서도 자본시장을 활성화하는 방법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주가를 정책 목표로 삼는 건 거위의 배를 갈라 황금알을 찾는 일처럼 어리석다. 기업의 장기 성장 동력을 확보하고, 고용 안정과 기술 혁신을 통해 국가경제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도모할 길을 찾아야 한다. 잭 웰치의 반성 혹은 변명이 언젠가 우리 정치판에서 재현되진 않을까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