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미국과 일본의 관세협상 최종 단계에 나서 일본에 부과하는 관세율과 일본의 대미(對美) 투자 규모 등 핵심 조건을 직접 결정한 것으로 보이는 사진이 공개돼 화제가 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22일(현지시간) 자신의 소셜미디어를 통해 일본과의 무역 협상 타결 소식을 전하면서 일본이 미국에 5500억 달러(약 760조 원)를 투자하고 자동차ㆍ농산물 시장을 개방하는 조건으로 미국은 대일(對日) 관세를 기존 25%에서 15%로 낮추기로 했다고 밝혔다.
댄 스커비노 백악관 부비서실장은 이날 트럼프 대통령이 미ㆍ일 무역협상 합의 소식을 발표한 직후 소셜미디어 엑스(Xㆍ옛 트위터)에 백악관 집무실에서 찍힌 사진을 올렸다. 이 사진 속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일본 관세 협상을 총괄하는 아카자와 료세이 경제재정ㆍ재생상과 대화하고 있고 미국 마코 루비오 국무부 장관, 스콧 베센트 재무부 장관, 하워드 러트닉 상무부 장관과 야마다 시게오 주미 일본대사 등이 배석한 채 대화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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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 ‘4000억달러’ 지우고 ‘5000억달러’
눈길을 끄는 건 트럼프 대통령 책상 앞에 올려진 한 장의 패널이다. ‘일본, 미국에 투자하다(Japan Invest America)’는 제목의 이 패널에는 일본의 대미 투자액으로 4000억 달러라고 인쇄된 것에서 숫자 ‘4’에 선을 긋고 수기로 ‘5’라고 쓴 것이 포착된다. 대미 투자 규모를 즉석에서 5000억 달러로 1000억 달러 늘린 것으로 해석되는 장면이다. 일본이 당초 4000억 달러의 대미 투자를 제안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막판에 5000억 달러로 상향한 뒤 최종 발표 단계에서 다시 5500억 달러로 500억 달러를 더 늘린 것으로 추정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대일 관세율과 투자 결과로 인한 미국의 이익 점유 비율도 당초 일본이 제시한 조건보다 미국에 유리한 쪽으로 수정한 것으로 보인다. 패널에 인쇄된 문구는 ‘관세율 10%’, ‘이익 공유 50%’라고 돼 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일본에 부과하는 상호 관세율을 15%라고 발표했다. 패널에 적힌 10%에서 5%포인트 오른 수치다. 일본의 5500억 달러 대미 투자 후 미국이 거둬가는 이익 배당과 관련해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이 90%를 가질 것이라고 했는데, 이 역시 애초 패널에 적힌 50%에서 40%포인트나 오른 것이다.
또 패널에는 ‘자동차ㆍ의약품ㆍ반도체 관세 15%’라고 인쇄돼 있는데, 여기에도 의약품과 반도체 위에 ‘20%’라는 숫자가 손글씨로 적혀 있다. 품목별 관세율은 세부 조건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이르면 이달 말 공개하겠다고 한 의약품ㆍ반도체 관세율을 일본에 대해서는 20% 적용할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대목이다. 자동차의 경우 기존 관세 2.5%를 포함해 15%를 적용한다고 일본 정부 관계자는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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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트닉 “日 5500억달러 투자처 美 결정”
사진 속 패널은 러트닉 상무장관이 만든 것이라고 한다. 그는 23일 블룸버그TV 인터뷰에서 “제가 그 커다란 판을 만들어 거기에 올려뒀다”며 “미국 최고의 협상가인 도널드 트럼프가 그곳에 앉아서 협상을 했다”고 전했다. 러트닉 장관은 일본의 5500억 달러 대미 투자와 관련해 “일본은 미국에 (투자 대상) 프로젝트 선정 권한을 줄 것”이라며 “대통령이 ‘미국에서 항생제를 만들자’고 하면 일본이 해당 프로젝트에 자금을 대고 우리는 프로젝트 운영 사업자에게 자금을 줄 것이며 이익의 90%는 미국의 납세자가 갖고 10%는 일본이 가질 것”이라고 말했다. 5500억 달러는 일본의 자본, 대출과 대출 보증 등을 합한 액수라고 했다.
러트닉 장관은 또 자신이 지난 1월 일본에 대규모 투자 펀드 구성을 제안했다고 밝혔다. 그는 “일본은 절대로 트럼프 대통령이 원하는 대로 자국 시장을 진짜로 개방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며 “그래서 나는 일본에 (트럼프) 일본이 대통령과 미국 국가안보를 위해 필요한 무엇이든 지을 수 있는 금융을 제공하는 4000억 달러 펀드를 제안했다”고 말했다. 러트닉 장관이 제안한 4000억 달러의 대미 투자 펀드가 트럼프 대통령 최종 재가를 거치면서 5500억 달러로 1500억 달러 늘어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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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약품·광물·반도체에 투자 집중”
미국은 일본의 투자 자금을 조선ㆍ의약품ㆍ핵심광물ㆍ반도체ㆍ에너지 등 전략적 산업에 집중하겠다고 밝혔다. 백악관은 23일 ‘미ㆍ일 간 전례 없는 전략적 무역ㆍ투자협정 체결’이란 제목의 설명자료를 통해 “5500억 달러는 가장 큰 규모의 외국 투자 약속으로 미국 내 수십만 개 일자리를 창출하고 제조업을 확대하며 미국 번영을 보장할 것”이라고 했다.
이어 투자 자금의 구체적 사용처로 ▶신규 조선소 건설 및 기존 시설 현대화를 포함한 상업 및 국방 선박 건조 ▶제약 및 의료 제품 생산 ▶필수 원자재 접근권 확대를 위한 핵심광물 채굴ㆍ가공ㆍ정제 ▶설계부터 제조까지 반도체 제조 및 연구 역량 재건 ▶액화천연가스(LNG)ㆍ첨단연료ㆍ전력망 현대화를 포함한 에너지 인프라ㆍ생산 등을 열거했다.
이와 함께 백악관은 이번 협정을 통해 일본이 옥수수, 대두, 비료, 바이오에탄올, 지속 가능 항공유(SAF) 등 미국 제품 80억 달러(약 11조 원)어치를 구매하고, 미국산 쌀 수입을 75% 증가시키는 동시에 수입 할당량을 크게 확대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 일본이 미국의 국방장비 구매에 연간 수십억 달러를 추가해 인도ㆍ태평양 지역에서의 상호 운용성과 동맹 안보를 강화하기로 했다는 내용과 알래스카 LNG에 대한 새로운 공급 계약 검토, 일본의 보잉 항공기 100대 구매 협정을 포함한 미국산 상업용 항공기 구매 약속 등도 이번 협정에 들어갔다고 전했다. 이밖에 미국산 자동차ㆍ트럭에 대한 장기적 수입 제한이 해제되고 미국의 자동차 기준이 일본에서 처음으로 승인된다고 소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