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바닥보다 작은 엽서 뒷면에 적힌 글씨, ‘Marathon K.Son 손긔졍 KOREAN 1936.15.8.’ 손기정(1912~2002) 선수가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 엿새 후인 8월15일 어느 독일 팬에게 해준 서명이다. 당시 시상대에서 불린 이름은 일본식인 ‘기테이 손(KITEI SON)’이었지만 그는 사인할 때마다 한글로 이름을 쓰거나 코리안이란 걸 강조했다. “어떻게 하면 내가 일본 사람이 아니라 조선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리느냐”는 고민에서 그랬다고 훗날 자서전(『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 1983)에서 밝혔다.
89년 전 손기정의 사인이 담긴 올림픽 기념엽서가 국립중앙박물관(서울 용산구)의 광복 80주년 특별전 ‘두 발로 세계를 제패하다’를 통해 공개됐다. 해당 엽서는 개인 수집가인 허진도(84)씨가 1979년 독일 경매업체를 통해 입수한 것으로 실물이 전시된 건 처음이다. 24일 박물관 사전 공개회에 참석한 허씨는 “올림픽 기념품을 주로 취급하는 업체에서 카달로그가 와서 눈여겨봤다가 경쟁 입찰 끝에 당시로선 거금을 주고 샀다. 너무 귀해서 여태 전시에 내놓는 것도 아꼈다”고 밝혔다. 전시를 기획한 권혜은 학예연구사는 “서명 날짜가 우연찮게도 8월15일이라 광복 80주년에 더욱 뜻깊은 공개가 됐다”고 말했다.
전시가 열리는 상설전시관 기증 1실은 손 선수가 1994년 박물관에 기증한 그리스 청동투구(보물)가 상설 전시되는 곳이다. 그는 마라톤 우승 부상품이었던 투구를 50년 만인 1986년 전달받은 뒤 “나만의 것이 아닌 우리 민족의 것”이라며 박물관에 기증했다. 이와 함께 손기정기념관(서울 중구)이 소장한 올림픽 금메달·월계관·우승상장(이상 등록문화유산) 등 관련 유물 18건이 한데 모였다. 1936년 8월10일자 뉴욕타임스가 ‘일본이 마라톤을 제패했다’는 제목의 기사를 내면서 손기정에 대해 ‘한국 태생(Korean-born)’이라고 적시한 부분이라든가, 시상대 위 손기정 가슴의 일장기를 지웠던(‘일장기 말소 사건’) 동아일보 8월25일자 신문 등을 만나볼 수 있다. 기증실 입구의 길이 11.8m에 이르는 벽면에 인공지능(AI) 딥러닝으로 재현한 우승 여정이 젊은 관객의 이해를 돕는다.
손기정은 광복 후 후배들을 지도하면서 서윤복(1923~2017) 선수의 1947년 보스턴 마라톤 우승 등을 이끌었다. 전시 제목은 당시 백범 김구(1876~1949)가 서윤복의 보스턴 마라톤 우승을 축하하며 써준 휘호 ‘족패천하(足霸天下)’에서 왔다. 유홍준 관장은 “주로 독립운동 영웅들에 초점을 맞추지만, 고난의 시절에 자신의 분야에서 희망과 용기를 줬던 사람들도 영웅”이라면서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에게도 손기정의 위업을 기리는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전시는 25일부터 12월 28일까지, 입장 무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