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엇 이건 진짜 같네….”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K팝 팬이든 아니든 마찬가지다. 헌트릭스와 사자보이즈가 무대에서 펼치는 완벽한 대형, 카메라가 360도로 돌며 잡아내는 역동적 안무로 재현된 K팝은 미국 애니메이션 속 가상의 아이돌에게 기대한 수준을 훌쩍 넘었다. 골수 K팝 팬은 그 재현의 완성도에 공감하고, 초심자는 귀에 쏙쏙 박히는 노래를 들으며 왜 전 세계가 K팝에 열광하는지 한눈에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할리우드 애니 ‘케데헌’ 열풍
단지 ‘잘 팔리는 문화’가 아니라
세계인이 따라 하는 원본 제시
BBC는 ‘케데헌’을 두고 “진품 같다(Authentic)”고 평가했고, 다른 언론들은 “K팝의 심장과 영혼이 담겼다”고 썼다. 한마디로 ‘진짜배기’ K팝이라는 것이다. 진짜배기라 부를 수 있다는 건 가짜와 구별되는 원본이 존재한다는 의미다. 한복과 갓, 호랑이, 도자기, 우리가 쉽게 진짜와 가짜를 구분할 수 있는 전통문화가 있듯, K팝도 진위 여부를 가릴 정도로 또렷한 정체성을 확립했다는 뜻일 것이다.
돌이켜보면 얼마나 오랜 시간을 우리는 할리우드의 대중문화 속에서 스테레오타입으로 머물러왔던가. 한국인의 얼굴이 아닌 한국인, 한국말을 못하는 한국인, 기껏해야 김치나 편의점 주인으로 기억되는 한국인으로서 말이다. 하지만 지난 20~30년간 미국 대중문화를 원본 삼아 익히고 갈고 닦은 결과, K팝은 스테레오타입의 틀을 벗고 새로운 원본을 만들어냈다. 이제 그것이 다시 미국으로 되돌아가 그곳 문화에 든든한 뿌리를 내렸음을 ‘케데헌’이 증명한다. ‘케데헌’을 보는 한국인으로서의 남다른 감흥이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만들어낸 문화적 문법이 이렇게 정교하게 재현되는 걸 보면서 우리가 만든 걸 새삼 되돌아보는 뿌듯함이다.
영화는 표면적 기호만 활용하지 않았다. 소파에 기대어 거실 바닥에 앉아 종이냅킨을 깔고 젓가락을 놓은 뒤 컵라면을 먹는 장면 같은 디테일도 정확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K팝이 가진 정서적 코드까지 담아냈다는 점이다.
케이팝 아이돌과 팬덤, 그리고 이 산업의 속성 또한 화려한 겉모습을 넘어서 이중성을 그렸다.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과 팀워크의 중요성 등 K팝이 내포한 진짜 이야기를 그려낸 것이다. K팝을 단지 피상적인 요소로 다루지 않고, 진정성과 존경심으로 그 문화를 들여다보려 했다. 진짜 K팝, 진짜 한국문화에 대한 애정과 헌신으로 그 안에 담긴 깊은 감정을 진지하게 탐구한 것이다. 감독은 “한국말을 하는 사람들의 입 모양까지 정확하게 담아내려 했다”고 밝혔다. 그렇게 “한국 문화에 대한 러브레터”를 쓴다는 마음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그런 마음이 전해져서 영화는 세계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영화를 보는 세계의 소녀들이 ‘겨울 왕국’의 ‘렛잇고’로 2013년을 기억하는 것처럼 ‘골든’을 2025년의 추억의 노래로 간직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영화가 미국에서 제작된 점은 문화의 흐름이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영화가 소비되는 과정은 단순히 콘텐트의 소비가 아니라, 문화의 감각이 순환하는 구조임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BTS의 정국이 ‘케데헌’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는 일을 생각해본다. 그는 “루미가 혼자서 혼문을 만들겠다고 말하고 경기장으로 달려갔을 때 눈물이 떨어졌다”고 말했다. 그동안 수많은 해외 팬들이 방탄소년단을 보고 리액션 영상을 만들게 했던 그 주인공이었다. 이제는 그 방향을 바꾸어 리액션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가 주인공이 되어 만든 K팝이 외국에서 재해석되어 그에게 다시 감동을 준 것이다. 국내 가수들이 ‘골든’ 노래나 사자보이즈의 커버를 잇달아 하는 모습 역시 마찬가지다. 가상의 K팝이 진짜 K팝 생태계로 역으로 스며드는 현상이다. K문화를 ‘수출되는 재화’로만, 우리나라에서 다른 선진국으로 ‘진출’하는 대상으로 바라보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문화는 경계를 넘어 돌고 돌며 서로를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다.
이제 K팝은 ‘한국’이라는 지역적 의미를 넘어 전 세계 어디서든 만들어질 수 있는 문화적 문법이 되었다. 한국인이 한 명도 없는 K팝 그룹이 탄생하고, 로제와 브루노 마스의 듀엣곡처럼 국적을 따지기 힘든 곡들이 나온다. 언젠가는 ‘골든’을 부르는 소녀들도 그 노래의 뿌리가 한국에 있다는 걸 의식하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가 재즈를 들을 때 그것이 미국 남부에서 시작됐다는 역사를 매번 떠올리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중요한 것은 세계인의 감정을 깊고 풍부하게 연결하는 문화적 흐름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원본을 만들어낸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뿌리를 더욱 깊고 단단하게 만드는 일이다. 문화의 진심은 결국 국경을 넘어,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이고 그 마음이 다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우리는 그 글로벌한 순환의 한복판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