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 도봉산 해촌동(도봉구 방학동)의 산기슭, 세상을 내려다보듯 규모가 꽤 큰 쌍분 형태의 묘역에 세종의 딸 정의공주 부부가 잠들어 있다. 정갈하게 잘 관리된 덕분인지 묘역은 550년 세월이 무색하리만치 ‘공주다운’ 면모를 그대로 간직한 듯하다. 조선 시대 왕의 딸로 태어난 이는 공주와 옹주를 합하여 130명 남짓하다. 화려한 탄생과는 달리 그 삶은 각양각색이었다. 왕녀에 걸맞는 수준을 갖추고 산 이가 오히려 드물 지경이었다. 그런 가운데 세종의 딸 정의공주는 부귀를 구가하면서 천수를 누렸고, 지혜와 지식으로 세종의 정치 담론에 참여한 아주 특별한 존재이다.
험했던 조선 왕실의 예외적 존재
부귀·천수 누리고 정치에도 관여
세종은 섬 하사, 세조는 수시 문안
남편 죽자 법 어기고 정자각 세워
정인지와 겹사돈, 입지 다지기도
하사받은 저자도 지금은 흔적 없어
세종·소헌 부부의 고명딸
정의공주는 1415년(태종 15)에 태어나 1477년(성종 8)에 세상을 뜨기까지 만 62년을 살았다. 형제자매 가운데서 그녀는 세종의 정비 소생 8남 2녀는 물론 세종의 후궁 소생까지 포함한 18남 4녀로 쳐도 가장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사람이다. 정의(貞懿)는 문종과 세조를 비롯한 다른 형제 9명의 평균 수명 32세보다 약 두배를 더 산 것이다. 언니 정소공주의 이른 죽음으로 세종 부부의 고명딸이 된 정의공주는 인생 대부분을 세종의 딸로, 세조의 누나로 살며 최고 권력자의 사은(私恩)과 왕실 가족의 공적 대우를 함께 누렸다. 그런 점에서 정의공주는 15세기 조선사회의 특별했던 한 삶의 방식을 보여주는 사례다.
공주는 아버지 세종이 왕위에 오르기 직전에 태어나는데, 왕자녀 보육의 관행에 따라 그녀 역시 지정된 양모의 손에서 길러졌다. 세종과 소헌왕후는 1~2년 터울로 자녀를 생산하는데, 세종의 나이 22세 때인 즉위년에는 문종과 세조를 포함하여 자녀가 5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그런데 상왕 태종은 세종의 왕권 강화에 장애가 될만한 외척 세력을 미연에 제거했다. 가장 큰 피해자는 세종의 장인 심온(1375~1418)과 그 형제들이었다.
“의금부에서 심온의 아내와 딸들을 천인으로 삼고 가산을 적몰하기를 청하다.”(세종 즉위년)
심온의 장녀인 소헌왕후 또한 역적의 딸이라며 폐비론이 논의되는 형국인 데다 출산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녀로서는 아버지와 숙부의 죽음과 친정의 적몰을 그저 지켜봐야 했을 뿐이었다. “천인에 속하게 하더라도 부리지는 말라”는 상왕 태종의 말이 위안이 되었을까.
소헌왕후가 그런 큰 아픔을 딛고 나머지 아이들을 생산하면서 세종시대의 내치(內治)를 담당할 수 있었던 것은 남편 세종의 몫이 컸다. 즉 “비록 용맹하지 못한 듯하나, 큰일에 임하여 대의(大疑)를 결단하는 데에는 견줄 사람이 없다”라고 한 태종의 충녕(세종) 평가가 참고가 된다. 다시 말해 누가 뭐라 하든 죄 없는 아내 소헌을 지키겠다는 것이다.
세종이 손자 이름 지어주며 아껴
정의공주는 비록 양모 박씨의 손에서 길러졌지만 어머니의 이 트라우마를 감지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른바 ‘팔대군일공주(八大君一公主)’로 불린 오직 하나뿐인 딸이 아닌가. 정의공주는 14살의 나이에 동갑 안맹담에게 하가(下嫁·지체 낮은 곳으로 시집감)하여 4남 2녀를 낳았다. 세종과 소헌왕후는 공주의 자녀들을 무척 사랑하여 직접 이름을 지어주었다. 노는 모습이 수달을 닮았다고 하여 여달(如獺)이라 짓고, 공주의 해산 소식과 함께 닭이 뽕나무에서 울었다며 ‘뽕나무 위의 닭’이라는 뜻의 상계(桑雞)로 지었다. 공주의 아들로는 안여달과 안상계 외에 안온천·안빈세가 있다. 국왕과 중궁은 심신이 불편할 때면 공주의 집에 가서 지내곤 했다. 실록에만 수차례의 이어(移御) 기록이 나온다.
세종은 사랑하는 딸 정의공주에게 저자도(楮子島)를 하사했다. 닥나무가 많아 이름이 저자도가 된 섬은 도성 동쪽 25리, 중랑천이 한강 본류와 만나는 지점의 뚝섬 앞쪽에 있던 삼각주다. 아름다운 경치로 유명해 고려시대 때부터 많은 문인의 발걸음이 그치질 않았고, 풍경에 매료된 시인들의 노래가 쌓여갔다. 16세기 문인 심수경은 저자도에서 서쪽으로 1리쯤에 봉은사가 있다고 하고, 동호 독서당에서 사가독서할 때 배를 타고 가 저자도에 정박해놓고 봉은사를 구경하고 왔다고 한다. 섬 곳곳에 살구꽃이 만발하여 봄 경치가 더욱 아름다워 시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정의공주가 하사받은 저자도와 낙천정(樂天亭)은 막내아들 안빈세(安貧世)에게 돌아갔다. 오랫동안 안씨 소유이던 섬은 주인이 바뀌었는데, 근세까지 경기도 광주군 소속의 저자도에는 10여 가구의 농가가 있었다고 한다. 1970년대 압구정동 택지 조성에 섬의 흙과 모래가 사용되면서 36만평의 저자도는 한강의 수면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저자도는 세종의 딸 정의공주를 떠올리게 하는 역사 장소이다.
공주의 남편 안맹담이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자 세조는 이틀 동안 조회를 열지 않고 쌀과 콩을 합쳐서 90석, 정포 70필, 종이 200권을 부의하며 친히 제문을 지었다. (세조 8년) 안맹담의 졸기에는 술을 너무 좋아해서 술병을 얻어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세종은 사위가 너무 술을 마시자 그의 술친구를 불러 왜 술을 마시는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를 묻자 다들 겁을 먹고 안맹담과 술자리를 피했다고도 한다. 그는 부귀한 집에서 생장하여 학술은 없으나 초서 및 음률에 조예가 깊었고, 불교에 심취하여 자신의 집에 승려 10여명을 데려다 놓고 함께 지냈다고 한다. 이러한 안맹담과 정의공주는 금슬이 남달라 안맹담의 관을 땅에 묻을 때 정의공주가 목놓아 울며 크게 슬퍼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정의공주의 남편 사랑이 공론화된 것은 안맹담의 묘역에 정자각(丁字閣)을 세운 사실 때문이었다. 정자각은 왕릉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봉분 앞에 세운 ‘丁’ 자 모양의 제각이다. 공주는 ‘인신(人臣)은 능침을 침범할 수 없다’는 법을 어긴 것이다. 태어나서부터 부귀영화를 누려온 공주로서 나랏법에 대한 개념이 부족했을 수도 있겠다.
세조 배려로 온천욕 즐겨
세조 시대의 정의공주는 국왕의 비호 아래 온천 탐방을 즐기는 모습으로 자주 등장한다. 공주가 가는 곳이면 어김없이 세조의 특별령이 떨어졌다. 세조 2년에는 “고성 온정(溫井)에 목욕가는 정의공주에게 교자(轎子)와 담부(擔夫)를 주라”고 했고, 세조 4년에는 “황해도 관찰사에게 정의공주가 배천 온정에 목욕가니 감영의 쌀 10석(石)과 황두 5석을 주라”는 유시가 있었다. 이런 당부도 있었다. “정의공주가 온정(溫井)에 와서 목욕하니 술과 숯을 정성스럽게 더 지급하고 본고을 군수는 그곳에 항상 머물며 공주가 찾는 물건이 있으면 즉시 대령하라.”(세조 14년)
세조는 중궁과 함께 수시로 정의공주 집을 방문하여 문병과 문안을 하였다. 또 수시로 정의공주에게 쌀과 콩을 내리는데, 그 규모는 50석 또는 100석이었다. 공주의 아들과 사위에게는 관직을 제수하거나 승진을 시키면서 공주의 환심을 얻고자 했다.
한편 정의공주는 정인지(鄭麟趾)와 사돈을 맺는데, 각자의 위치를 공고히 하려는 뜻이 없을 수 없다. 정의공주의 딸과 정인지의 장남, 정의공주의 손녀와 정인지의 막내아들이 혼인함으로써 정의공주의 입지는 더 탄탄해진다. 천문·역법에 뛰어난 능력을 지녀 대제학 등의 여러 요직을 거치며 세종 시대 과학 발전의 중심인물로 부상한 정인지는 한편에서는 조선 4대 부자에 들 만큼 부유하기로 이름이 났다. 하지만 정인지에 대한 세간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장리(長利·이자놀이)로 재산을 축적한 정인지가 왕사(王師)로 거론되자 대간(臺諫)들이 일제히 거부했다. “한미한 가문에서 자수성가하여 몸을 일으켰으나 식화(殖貨)에 전념하여 재산을 치부하였으니 존경할만한 인물은 아니다.”
한편 정의공주는 이에 연연하지 않고 권력과 재물의 성을 구축했다. 누구에게나 험난했던 조선의 역사에서 정의공주처럼 화려하면서 따뜻한 삶을 살았던 이가 있었는가. 모든 부귀영화는 시간과 함께 사라지는 것인가.
세월이 흘러 공주 소유의 아름다운 저자도는 개발 논리에 의해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공주가 구축한 부귀영화의 성도 후손의 삶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