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의 대선 공약 중 하나가 인공지능(AI) 3대 강국이다. AI가 세상을 바꾸는 기술로 떠오른 만큼 의미 있는 목표다. 이를 위해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으로 배경훈 LG AI연구원장을, 신설된 AI미래기획수석으로 하정우 네이버클라우드 AI이노베이션센터장을 임명했다.
하지만 국회에선 정반대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국회 교육위원회와 법제사법위원회는 AI 디지털교과서를 ‘교육자료’로 분류하는 초중등교육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다음 달 초 본회의 의결만 남았다. 가장 큰 차이는 교과서는 무상 공급 대상이지만 교육자료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국회 AI교과서 지위 박탈 임박
양질의 교육 데이터 수집 못 해
소버린 AI 위해서도 활용해야
AI 교과서는 책처럼 한 번 사서 쓰는 것이 아니라 웹 기반으로 제공되는 교육 서비스다. 학생 1인당 과목별로 월 5000원 내외의 구독료를 부담해야 한다. 지위가 교과서에서 교육자료로 바뀌면 구독료에 대한 예산 지원이 끊긴다. 자연히 채택하는 학교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채택률이 떨어지면 AI 교과서 발행사의 채산성이 나빠지고, 신규 개발 의지도 위축된다. 따라서 교육자료로 격하되면 AI 교과서는 퇴출 수순을 밟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이런 식의 정책 변경으로 기업이 손해를 보면 누가 정부를 믿고 적극적인 투자를 할 수 있겠나.
더 큰 문제는 양질의 데이터 확보다. 현재 AI 교과서는 교육부 산하 한국교육학술정보원(KERIS)의 AI디지털교과서 포털에서 로그인을 하고, 선택한 교과서로 학습을 하는 방식이다. 종이 교과서는 출판사마다 목차와 학습 순서가 다르지만, AI 교과서는 포털에 동일한 기준으로 학생의 학습시간이나 수행도, 성취도, 참여도 같은 데이터가 쌓인다. 그러나 교육자료가 되면 개별 업체 제품을 학교가 알아서 선택하게 된다. 검정을 받지 않아도 되고 업체는 데이터 호환을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국가가 교육 데이터를 요구할 근거도 사라진다.
그런데 민주당이 주도한 개정 법안은 교육자료 격하 이후의 대안이 보이지 않는다. 국회 교육위 회의 자료를 보면 AI 교과서를 교육자료로 분류하되, 그 이후의 대책은 교육부가 만들어오라는 식이었다. 교육부는 부칙에 별도 조항을 넣어 현 AI 교과서를 내년 2월까지 쓸 수 있도록 하자고 제안했지만 민주당 교육위 의원들은 부정적이라고 한다.
물론 AI 교과서를 오류가 있으면 안 되는 교과서로 규정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실제로 AI 교과서는 지속적인 유지 보수를 해야 한다. 일부에서 AI 교과서 품질이 기대 이하라는 지적이 나오지만 이런 서비스는 계속 업그레이드가 필요하다. 챗 GPT도 신규 버전이 나오면서 기능이 개선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교과서라는 지위 자체보다 적정 이용자를 확보할 수 있는 구독료 지원과 교육 데이터를 통일된 기준으로 축적하는 구조를 어떻게 만들 수 있느냐다. 이재명 정부는 AI 강국이라는 목표 실현을 위해 해외 기술에 의존하지 않는 ‘소버린(주권) AI’를 구축하겠다고 밝혔다. 소버린 AI로 나아가려면 컴퓨팅 장비뿐 아니라 양질의 데이터가 필요하다.
배경훈 장관은 지난 14일 인사청문회에서 “AI가 승부를 보려면 양질의 데이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AI 교과서 문제에 대해선 “여러 부처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 임명 후 살펴보겠다”며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네이버 근무 시절 AI 교과서에 우호적인 발언을 한 하정우 수석이 대통령실 내부에서 AI 교과서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내용의 보도가 있었다. 하지만 대통령실이 이를 부인했다는 취지의 후속 보도도 나왔다. 정부 고위직이 된 민간 출신 AI 전문가들이 제 목소리를 낼 수 없다면 과연 AI 강국이라는 목표를 제대로 달성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지금 AI 교과서를 격하한다는 것은 이제 막 쌓기 시작한 표준화된 교육 데이터를 포기하겠다는 선언과 다름없다. 윤석열 정부가 국회 다수당인 민주당의 동의 없이 AI 교과서를 급하게 추진한 점은 문제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육자료로 전환해 채택률을 낮추고 데이터를 파편화하는 방향도 옳지 않다.
정보나 수학, 영어 등 이미 도입한 과목에서라도 AI 교과서를 유지하며 기능을 개선하는 게 합리적이다. 이용 상황을 좀 더 지켜보고 최종 결정을 내려도 늦지 않다. 이를 통해 쌓인 양질의 교육 데이터는 소버린 AI 구축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데이터는 AI 산업혁명의 필수 원자재”라고 말했다. 대안 없는 AI 교과서의 지위 박탈은 핵심 원자재 채굴을 멈추겠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