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닫기

[시선2035] 국회에서 만난 ‘원수’

중앙일보

2025.07.27 08:02 2025.07.27 13:44

  • 글자크기
  • 인쇄
  • 공유
기사 공유
박건 플러스콘텐트랩 기자
“원수는 직장에서 만난다.” 방송인 박명수씨가 과거 ‘무한도전’에서 한 유명한 말이다. ‘성격을 바꿔보라’고 지적하는 상사가 스트레스라는 직장인의 고민에 “팀장을 바꿀 순 없지 않냐”며 남긴 명언이다.

보좌진 갑질 의혹으로 낙마한 강선우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보며 저 말을 곱씹어본다. 보도된 의혹이 사실이라면 보좌진이 강 장관을 원수로 여길 만도 했다. ‘쓰레기를 버려달라’는 지시가 부당해도 어쩌겠나. 의원님을 내다 버릴 순 없으니.

지난해 6월 제22대 국회 개원을 앞두고 시민들이 국회의사당 앞을 지나가고 있다. [뉴스1]
지난해 이맘때쯤 직장 갑질을 주제로 법무법인 율촌의 조상욱 변호사를 인터뷰했었다. 조 변호사는 ‘갑질’이라는 말이 생기기도 전인 1999년부터 기업 노동 법무를 담당해 온 베테랑이다. 그에게 갑질을 예방하는 방법을 물었더니 자기 성찰이라는, 다소 원론적인 답이 돌아왔다.

“자기 언행을 돌아볼 정도의 양심이 있다면 애초에 갑질을 안 저지르지 않을까요?” 다시 묻자 조 변호사는 부연했다. “인격에 문제가 있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그건 고치기 어렵죠. 그래서 기업이 객관적으로 조사해서 엄정하게 판단해야 하는 겁니다.” 결국 갑질을 제대로 조사하고, 마땅한 조처를 내리는 시스템이 중요하다는 의미다.

그런 시스템을 마련하는 건 결정권을 쥔 상급자의 몫이다. 국회에선 의원들이 그 역할을 해야 할 텐데 쉽지 않을 것 같다. “너무 가까운 사이라 의원들도 (보좌진에게) 가끔 사적인 심부름을 거리낌 없이 시키는 경우도 있다”(문진석 의원)는 황당한 방어 논리가 여당에서 나왔던 걸 보면 합리적인 추론이다.

오랜만에 공격권을 가져온 국민의힘이라고 떳떳할까. 4년 전 개표상황실에 자기 자리가 없다며 사무처 당직자의 정강이를 걷어찼던 의원은 징계를 피하려고 탈당했다가 돌아와 지금은 당의 비상대책위원장을 맡고 있다.

강 의원의 자진 사퇴로 갑질 의혹은 일단락됐지만, 요즘 여의도에는 불편한 기류가 흐르고 있다고 한다. “택시 타는 게 무서우니 저녁 약속 끝나면 데리러 오라” “집밥을 먹어야 힘이 나니 의원실에 밥을 해놓으라”는 갑질 소문이 여의도에 무성한데, 언제 실명으로 폭로될지 알 수 없어서다.

모처럼 상사가 내 눈치를 보는 생경한 경험을 하고 있을 보좌진이라고 마음이 편할 리는 없다. 최근 의원들의 오남용으로 단어가 오염됐지만, 내가 만난 보좌진 중엔 의원을 진심으로 ‘동지’라고 여기는 이가 적지 않았다.

이번 사건으로 의원회관의 ‘을’들을 보호하기 위한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게 분명해졌다. 갑질 의혹 공방 과정에서 입이 마르게 동지를 찾던 여야 의원들이 보좌진과 논의해 타당한 방지책을 내놓길 기대해본다. 누군가에겐 국회에서 만난 ‘원수’일 이가 두 얼굴로 나랏일을 하는 건 국민도 원치 않는다.





박건([email protected])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