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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시조 백일장 - 7월 수상작] 마지막 문구의 쓸쓸함, 눈길 오래 머물렀다

중앙일보

2025.07.27 08:10 2025.07.27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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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
상자의 시간
나정숙

음악이 시작되자 컨베이어 돌아간다
새벽 잔물결 위로 물수제비 낮게 뜨면
섬들은 몸을 세우고 출항을 기다린다

단단한 실핏줄이 모서리가 되는 동안
손은 기계가 되고 시간은 상자가 된다
밀봉된 파도 한 자락 그리운 맘 얹는다

하루가 빠져나간 눈꺼풀 감겨온다
흐르는 물살 따라 바코드 넘겨지면
외딴섬 절벽 너머로 후마*가 날아간다

*평생을 땅에 내려앉지 않고 눈에도 띄지 않는다는 전설 속 행운의 새.


◆나정숙
광주광역시 출생. 조선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 학과 석사 졸업. 중앙시조백일장 2023년 10월, 2024년 9월 장원. 후조 동인, 우듬지 동인.

차상
조선낫
손창완

들레길 걷다 발견한 녹이 슨 조선낫
족보 없는 삶을 살던 쇠똥이가 생각나고
무명옷 삭아 없어진
청산리가 생각난다

죄수도 아닌 몸을 골짜기에 가두고
인두겁을 눌러 쓴 적병 향해 고누던
가을산 나무를 베던
조선낫 녹슨 뼈대

만조의 바닷물은 때가 되면 빠지지만
식지 못해 녹으로 핀 쇠똥이의 붉은 피는
쇠솔로 쓸고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다

차하
인플루언서
한명희

사각의 방 안에서 매일 빛을 삼킨다
몇 개의 해시태그 필터 한 겹 벗겨진다
과거의 나를 지우고 오늘의 나를 그린다

빛나는 순간만 골라 파도처럼 쏟는 피드
누리꾼 매의 시선 오롯이 머물 때마다
좋아요, 댓글, 공유로 내 존재 확인한다

이달의 심사평
염천에도 불구하고 응모 편수도 많았으며 질적 수준도 풍성했다. 각자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어르고 달래가며 우리시의 독창적인 맛을 살리기 위해 노력한 응모자들의 흔적을 읽을 수 있었다. 좋은 시조는 읽는 이의 마음을 일렁이게 하는 감동이 있어야 한다.

먼저 시조의 근간인 정형율에 충실하면서 작품의 내면에 생명을 불어넣는 선명한 이미지 확보에 초점을 맞추었다. 3장 6구 12마디의 시조 형식은 부단히 반복을 요구한다. 이것을 자기만의 가락으로 체화할 수 있을 때 시적 성취가 이뤄진다.

논의 끝에 이달의 장원에 나정숙의 ‘상자의 시간’을 앉혔다. 오랜 숙성을 거친 사유와 자신만의 개성 있는 언어로 작품을 빚은 솜씨가 믿음을 주었다. 같이 보내온 작품들도 긴 습작의 시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시조의 묘미는 종장에 있는데 각 장마다 마무리가 좋았으며 특히 마지막 수의 종장 ‘외딴섬 절벽 너머로 후마*가 날아간다’는 액자 속 하염없이 쓸쓸한 풍경을 떠올리게 하는 이미지가 선자의 눈길을 오래 머물게 했다.

차상에는 손창완의 ‘조선낫’을 선했다. 녹이 슨 조선낫에 투영된 민초들의 삶과 선조들이 피땀으로 지켜온 이 땅의 역사를 세 수의 작품에 묵직하게 담아냈다. 화자의 진정성이 뭉클하게 마음에 와 닿았다.

첨언 하자면 퇴고 과정에서 정형시의 보법에 어긋나지 않는지 거듭 음독해 볼 일이다. 그런 과정을 거치다 보면 군더더기 없는 자연스러운 시조의 가락을 완성할 수 있다.

차하는 한명희의 ‘인플루언서’를 선했다. 현대인의 자화상을 시조의 틀 안에 잘 담아낸 수작이다. 다만 첫째 수의 종결어미를 모두 ‘다’로 맺었는데 다소 딱딱한 느낌을 주었다. 같이 보내온 ‘삭제의 양면성’에도 눈길이 오래 머물렀다. 신명숙, 이현주, 박혜린의 작품들도 논의가 있었지만 다음 기회로 미루었음을 밝히며 정진을 바란다.
심사위원 손영희·정혜숙(대표집필)

초대시조
남해
류미야

나도 몰래
그렁하게 차오르는
저 남쪽은
한 백 년 눈 시리게
바다도 끼고 앉아
단 한 번 살아본 적 없이
살아보고 싶은 곳

눈앞 바다가 그리워
해풍에도 주름이 진
다정한 다랭이논
가는 발목을 붙드는,
그리움
마저 버리고
앓아눕고 싶은 곳

◆류미야
경남 진주 출생. 2015년 〈유심〉 등단. 시집 『눈먼 말의 해변』 『아름다운 것들은 왜 늦게 도착하는지』. 중앙시조신인상, 올해의시조집상 등 수상.

남해는 남쪽에 있는 바다에 대한 대중적, 일반적인 호칭이다. 내 고향 바다를 떠올리게 하고, 깨끗하고 푸른 바다를 연상하게 하는 남쪽의 바다, 그 바다는 옆구리에 다랭이논을 끼고 있다.

다랭이논은 천수답이다. 경운기도 들어갈 수 없는 땅이어서 비가 내리지 않으면 사람이 직접 물동이를 지고 올라가 물을 주어야 하는 곳이다. 그 척박함을 못 견뎌 떠나야만 했던, 핍진한 노동의 산물이자 가난의 대물림이던 그곳은 생각만으로도 눈물이 차오르는 곳이다. 그러나 아픈 기억도 오래 매만지면 ‘다정’에 이르는가? 내 조상들이 살기 위하여 제단을 쌓듯 일궈온 터전이므로 언젠가 한 번쯤은 돌아가 꿋꿋이 살아내고 싶지만, 현실은 늘 정신적 유랑 속에 있으니 차라리 한 며칠 앓아누워서라도 머물고 싶은 간절함을 어찌하랴.

눈부시게 빛나는 바다와 ‘척박’의 근원 같은 다랭이논의 대비를 통해 작가의 시적 아우라를 폭넓게 보여주는 이 작품은, 우리의 영원한 과거이자 채워지지 않는 그리움의 대상과 마주하게 해준다. 이 시는 아주 나지막한 소리로 읊어야 맛이 살아난다. 허밍으로 귀를 애태우듯, 눈을 감고 다랭이논 발치에 서서 눈물 그렁한 눈으로 바다를 바라보아야만 더 애틋하게 읽히리라.

시조시인 강정숙

◆응모안내
매달 18일까지 중앙 시조 e메일([email protected]) 또는 우편(서울시 마포구 상암산로 48-6 중앙일보 중앙시조백일장 담당자 앞)으로 접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등단하지 않은 분이어야 하며 3편 이상, 5편 이하로 응모할 수 있습니다. 02-751-5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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