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틀 전 처음 정보라 작가님의 한글 번역본을 읽었는데, 내가 쓴 글 같지 않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너무 다행이었다. "
28일 오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자신의 첫 장편소설 『영원을 향하여』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 자리한 안톤 허(허정범·44)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영어와 한국어는 너무 다른 언어”라며 “작가인 나도 내 작품 같지 않다고 느끼며 즐겁게 읽을 수 있어야 번역이 잘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안톤 허 작가는 2022년 영국 부커상 인터내셔널 최종 후보에 오른 정보라 작가의 소설집 『저주토끼』와 박상영 작가의 연작소설 『대도시의 사랑법』을 모두 번역한 한영 문학 번역가이자 작가다. 부커상 인터내셔널에서 한 사람이 번역한 작품이 동시에 후보에 오른 것은 부커상 역사상 단 세 번만 있었던 사례다.
그의 첫 영문 장편소설 『Toward Eternity』는 2024년 미국의 대형 출판사 하퍼콜린스에서 출간됐다. 30일 출판사 오팬하우스에서 출간 예정인 한국어 번역본의 번역자로는 정보라 작가가 나섰다. 안톤은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정보라 작가님이 자신이 번역하겠다고 강력하게 제안했고, 나도 욕심이 나서 승낙했다”고 밝혔다.
이로써 둘은 더욱 특별한 관계가 됐다. 그는 『저주토끼』 외에도 세계 3대 SF 문학상 중 하나인 필립 K.딕상 후보에 오른 소설집 『너의 유토피아』 영어 번역자이기도 하다.
그는 “나 역시 번역가이기 때문에, 누군가 (내 작품을) 번역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왔다. 번역 작업이 희생이고 영광이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안톤 허’라는 번역명을 사용하고 있지만, 대학과 대학원을 모두 한국에서 나온 한국인이다. 스웨덴에서 태어났고, 코트라 해외 주재원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홍콩, 에티오피아, 태국, 한국을 오가며 자랐다.
“지금은 한국에도 청소년 소설이 많지만, 내가 자랄 땐 그렇지 않았다”고 말한 그는 “영문학엔 상대적으로 아동·청소년 소설이 많았다. 어릴 적부터 영문소설을 많이 읽었고, 영어로 소설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일종의 강박같았다”고 영어로 소설을 쓰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그는 “번역과 통역을 했던 건 (소설을 쓰는 것보다) 더 쉽게 해볼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그중 문학 번역을 했던 이유 역시 ‘영미 출판사들과 연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장편소설 『영원을 향하여』 구상을 시작한 시점은 201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문득 ‘사람 몸속의 암세포를 나노봇으로 교체하면 암이 낫지 않을까? 이 나노봇이 증식해 몸속의 세포가 모두 나노봇이 된 사람이 있다면, 그를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배우자에게 이 아이디어를 단편 소설로 발전시켜 보여줬으나, 배우자는 고칠 점이 많다는 반응이었다. ‘이 피드백을 다 수용하면 장편소설이 되겠다’고 생각한 그는 잠시 아이디어를 내려두었다.
그러다 소설을 시작하도록 만들어준 것은 이성복 시인의 시론집 『무한화서』(2015)다. 그는 『영원을 향하여』맨 앞 장, 한국 독자들에게 쓰는 글에도 “어느 날 서점에서 『무한화서』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굳이 글을 쓰려고 하지 말고 언어가 알아서 글을 쓰도록 내버려두라는 이성복 시인의 당부에, 제 스스로가 아닌 ‘영어’라는 언어가 소설을 쓰도록 내버려뒀더니 『영원을 향하여』가 지하철에서 마법처럼 쓰였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노봇에 관한 그의 상상에서 출발한 『영원을 향하여』는 나노 치료와 인공지능 기술로 인간의 경계를 넘어서게 된 미래를 배경으로, 인간성에 대해 탐구하는 내용이다. 말리 비코 박사의 일기를 따라 수백~수천년에 걸친 이야기가 이어지며, 불멸의 존재들이 ‘영원을 향하여’ 살아가며 생긴 일을 풀어간다.
안톤은 인간성에 대해 “인간(人間)이라는 단어는 사람 사이 공간을 일컫는 말”이라며 “인간이라는 건 사람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개념이 아니라 사람 사이에 벌어지는 일이다. 나의 인간성은 내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나에게 주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이어 그는 “(소설을 읽고 난) 우리가 서로에게 인간성을 부여해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