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약 20여일 앞으로 다가온 한·미 을지자유의방패(UFS) 연합연습에 대해 대통령실에 “조정”을 건의하겠다고 밝혔다. 앞서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이 “침략적 성격의 대규모 합동군사연습의 연속적인 강행”을 비판했는데, 약 9시간 만에 정부 고위 관계자가 사실상 유예·축소를 시사한 것이다. 주한미군은 “우리에게 전달된 내용은 없다”는 입장을 냈다. 국방부는 예정대로 연합훈련을 실시하겠다며 선을 긋는 모양새다.
정 장관은 28일 취임 직후 기자들과 만나 ‘한·미 연합연습에 대한 중지를 요청할 생각이 있나’란 질의에 “그럴 생각이 있다”면서 “내일 (국가안전보장회의·NSC)실무조정회의가 열리는데 여기서 이 문제가 주요하게 다뤄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대통령실 관계자에 따르면 이날 오전 이 대통령은 신임 장관 임명식에서 정 장관에게 해당 담화문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고 한다. 이어 이 대통령은 “평화적 분위기 안에서 남북한 간의 신뢰 회복이 중요하다”고 당부했다. 정 장관은 이에 “지난 몇년간 적대적 정책으로 인해 불신의 벽이 높은 만큼 평화 정착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답변했다. 이 대통령의 신뢰 회복 조치 강조에 대한 정 장관의 부응이 한·미 연합연습 조정이었던 셈이다.
정 장관은 또 김여정의 담화를 “과거의 거친 담화에 비해 순화된 표현이라고 생각된다”며 “아직 남북 간에 신뢰가 부족하다, 불신의 벽이 높다라는 것을 다시 확인했다”고 말했다. 이어 “아마도 8월 한·미합동군사훈련, 김 부부장 담화에도 적시 돼 있지만 그것이 가늠자가 되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앞서 김여정은 이날 오전 6시쯤 조선중앙통신 담화를 통해 이재명 정부의 대북 정책과 관련해 처음으로 입장을 내고 “또다시 우리의 남쪽 국경 너머에서는 침략적 성격의 대규모 합동군사연습의 연속적인 강행으로 초연이 걷힐 날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김여정은 대북 방송 중단 등 이재명 정부의 신뢰 조치에 대해서는 “진작에 하지 말았어야 할 일들”이라며 “평가받을만한 일이 못 된다”고 혹평했는데, 결국 내달 예정된 한·미 UFS 연습을 중단해 더 큰 ‘성의 표시’를 하라고 요구한 셈이다. 특히 한·미 간 관세 협상이 난항을 겪는 중에 연합훈련 카드를 내민 건 동맹을 이간하려는 의도도 있어 보였다.
올해 UFS는 내달 중순 시작한다. 통상 UFS에 앞서 진행하는 위기관리연습(CMX)을 포함하면 남은 기간은 20여일에 불과하다. 또 UFS는 연간 단위로 계획하는데, 이를 김여정의 담화 한 번에 정부가 반나절만에 즉각 반응한 셈이다.
대통령실은 이날 오전 “북측 입장에 대해 유의하고 있다”며 “평화 정착은 이재명 정부의 확고한 철학으로, 정부는 적대와 전쟁 없는 한반도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행동'을 일관되게 취해 나가고자 한다”는 입장을 내기도 했다.
앞서 2018년 문재인 정부 때도 남북, 북미 대화를 추동하기 위해 연합항모강습단훈련, 연합상륙훈련 등 대규모 실기동훈련(FTX)을 중단 또는 유예한 전례가 있다. 2018년 하반기 연습인 을지프리덤가디언(UFG)은 건너 뛰었고, 2019년엔 ‘동맹연습’으로, 2020~2022년엔 연합지휘소훈련(CCPT)으로 명칭을 바꿔 컴퓨터 시뮬레이션 훈련 위주로 진행했다. 이후 대규모 연합 실기동훈련이 부활한 건 윤석열 정부 들어서인 2022년 하반기 UFS 때부터다.
김여정 담화→이 대통령 '당부'→ 정 장관 "조정" 시사
이와 관련, 정 장관은 “(연합훈련은)우리 정부의 의지에 따라 조정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다. 구체적인 것은 논의를 해봐야 한다”고도 말했다. 하지만 연합훈련은 한·미 동맹의 영역이다. 미국과의 사전협의 없이 조정은 힘들다는 뜻이다.
이와 관련, 주한미군은 “기존과 같이 동맹의 훈련과 연습에 관한 모든 결정은 정해진 협의 과정을 통해 이뤄질 것”이라며 “최근 정 장관의 발언을 인지하고 있으나, 해당 제안과 관련한 세부 내용은 현재로서 미 측에 전달되지 않았다”는 입장을 냈다. 한국 측의 일방적 UFS 조정 가능성 시사에 대해 언론 보도를 보고 알았다는 취지다.
그러면서 “그의 제안과 관련한 세부 내용은 통일부에 문의하기 바란다. 그의 제안과 관련한 세부 내용은 현재로서 우리에게 전달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정 장관이 미국과의 사전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연합훈련 조정을 주장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대목이다.
특히 현재 한·미가 국방비 등 안보 협의까지 포함한 통상 협상을 진행 중이란 점을 고려하면 정 장관의 말 한마디가 파장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안보-통상 패키지 딜 협상 중에 어려운 의제를 더하는 격이 될 수도 있다.
논란이 확산하자 대통령실은 같은 날 오후 늦게 “한·미 연합훈련 조정은 통일부 장관 뿐만 아니라 국방부 장관 등 관련 부처 의견을 들어 결정할 것”이라고 진화에 나섰다. 국방부는 “한·미동맹은 굳건한 연합방위태세 유지를 위해 연합연습을 연례적으로 실시해 왔다”면서 “현재까지 연합연습 시행과 관련해 변경된 사항은 없다”는 입장을 냈다. 연합연습 조정은 정 장관 개인의 의견으로 분류하려는 분위기다.
한편 김여정은 이날 담화에서 “리(이)재명 집권 50여일만 조명해보더라도 한·미 동맹에 대한 맹신과 우리와의 대결 기도는 선임자와 조금도 다를 바 없다”고도 밝혔다. “우리는 서울에서 어떤 정책이 수립되고 어떤 제안이 나오든 흥미가 없다”면서다.
또 “아무리 동족 흉내를 피우며 온갖 정의로운 일을 다하는 것처럼 수선을 떨어도 한국에 대한 우리 국가의 대적 인식에서는 변화가 있을 수 없다”고 했다. 김여정은 “‘민주’를 표방하든 ‘보수’의 탈을 썼든 한국은 절대로 화해와 협력의 대상으로 될 수 없다”며 김정은의 ‘적대적 두 국가 관계’의 노선을 유지하겠다고도 확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