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고등교육은 그동안 무분별한 양적 확대의 후유증을 겪어왔다. 대학 구조조정에 매몰되다 보니 내실 강화와 질적 성장에는 충분한 역량과 자원이 투입되지 못했다.
지금 한국 대학의 경쟁력은 기술 강국, 교육 강국인 스위스와 비교하면 그 한계가 분명히 드러난다. 인구 1000명당 4년제 대학 졸업자는 스위스보다 두 배 이상 많지만, 석·박사 비율은 턱없이 낮다. 박사학위 보유자는 스위스가 한국보다 5~6배 많다. 2020년 영국 U21이 평가한 고등교육 시스템 랭킹에서 스위스는 미국에 이어 세계 2위, 한국은 24위를 기록했다. 2025년 IMD 국가경쟁력 순위에서도 스위스가 1위, 한국은 27위다. 고등교육의 경쟁력 부족이 국가 경쟁력의 발목을 잡고 있는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새 정부는 ‘서울대 10개 만들기’를 국정과제로 내세웠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UC 체제처럼 균형 발전과 질적 경쟁력을 동시에 추구하는 모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번 정책의 진정한 의미는 정부가 고등교육의 질적 도약을 위해 본격적인 재정 투자를 시작한다는 데 있다. 19세기 링컨 대통령 시절, 대학의 재정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추진한 모릴법(Morrill Act)은 오늘날 세계 최고 수준의 미국 공립대학들을 출현시켰다. 사립대학인 MIT도 설립 초기 모릴법의 혜택을 받으며 성장 기반을 마련했다.
하지만 단순한 재정 투자만으로는 안 된다. 서울대 수준의 교육과 연구가 지역 국립대에서도 실현되려면 실행 전략이 필요하다. 첫째, 지역 산업과 대학의 비교우위에 맞는 전략적 특성화가 필수다. 둘째, 우수 교수와 학생을 지역 대학으로 유치하려면 재정 지원과 함께 정주 여건을 개선해야 한다. 셋째, 교수 임용과 학사 제도, 대학 운영 전반에 있어 자율성과 혁신을 보장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법인화도 검토해야 한다.
1970년대 지방 거점 국립대 육성 정책은 이러한 전략적 투자의 성공 사례다. 그 결과 경북대 전자공학과, 부산대 기계공학과, 전남대 화공과가 성장했으며, 1980~90년대에는 지역의 우수 인재가 지역 대학으로 자연스럽게 진학하던 시절도 있었다.
필자가 몸담고 있는 경상국립대도 생명과학 분야의 특성화를 통해 세계적 연구성과를 만들어냈고, 최근에는 우주항공 분야를 특성화해 외부 전문가를 학장으로 초빙했다. 나름의 ‘서울대 10개 만들기’를 시작한 셈이다. 정부의 입법과 재정 지원이 더해진다면 국제 경쟁력을 갖춘 대학으로 거듭날 수 있다. 이제는 스위스처럼 고등교육 경쟁력으로 국가 역량을 업그레이드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