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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아이] 세상에서 가장 무자비한 단어

중앙일보

2025.07.28 08:14 2025.07.28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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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강현 워싱턴 특파원
트럼프는 관세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라고 우기곤 했다. 그에게 아름다운 그 단어는, 그러나 세계인들에겐 가장 무자비한 단어로 새겨지는 중이다. 일본 협상단을 앉혀놓고 제 마음 가는 대로 투자 액수를 고쳐 쓰는 장면은 과연 섬뜩했다. 트럼프는 합의를 ‘통보’했지만, 일본도 베트남도 인도네시아도 제대로 된 공식 합의서가 아직 없다. 세부 협상이 더 필요한 상황에서, 트럼프가 일방적으로 합의를 선언해버렸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가 이토록 폭력적인 방식으로 세계 경제를 뒤흔들고 있는 것이다.

지난 7월 22일(현지시간) 트럼프 대통령이 일본 협상단 앞에서 합의문을 고쳐 쓰고 있다. [사진 엑스 캡처]
협상 시한을 이틀 앞두고 우리 협상단은 초조할 것이다. 트럼프가 일본의 팔을 비틀어 끝내 5500억 달러(약 760조원)를 받아내는 걸 똑똑히 목격했기 때문이다. 유럽연합(EU) 역시 6000억 달러(약 830조원) 투자에, 미국산 에너지 7500억 달러(약 1038조원)어치를 구매하기로 다짐한 뒤에야 트럼프가 관세를 겨우 낮춰주기로 했다. 우리 협상단이 조선산업 협력을 매개로 최종 협상안을 만들고 있다지만, 막대한 투자금을 지불하고 마침내 합의에 도달한들 그게 최종 종착지인지도 불분명하다. 국가 간 약속도 언제든 뒤집을 수 있는 게 우리가 익히 아는 트럼프다.

이렇게 사뭇 염려스러운 마음으로 관세 협상을 취재하면서, 간혹 꺼내 보는 영상이 있다. 때는 2017년 1월 8일, 제74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이다. 공로상을 받은 배우 메릴 스트립이 수상 소감을 밝히면서 첫 대통령 취임을 앞둔 트럼프를 일갈한다. 그는 트럼프가 유세 현장에서 장애인 기자를 우스꽝스럽게 흉내 내던 장면을 소환한 뒤 이렇게 말했다. “그 장면을 봤을 때 제 마음은 무너졌습니다. 그것은 영화가 아니라 현실이었으니까요. 무례함은 무례함을, 폭력은 폭력을 부릅니다.”

스트립은 그 몇 해 뒤 들어설 트럼프 집권 2기도 미리 내다봤던 걸까. 장애인 기자를 조롱하던 그 무례함과 무자비함이 관세 협상을 하는 상대국에 고스란히 재현되고 있다. 폭력은 타인의 의사에 반해 타인을 억압하는 모든 행위다. 그러므로 트럼프식 ‘관세 협상’을 ‘관세 폭력’이라 바꿔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8년 전 스트립은 이 폭력의 경제학까지도 예견한 듯 매섭게 경고했다. “권력을 가진 자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타인을 괴롭힐 때, 우리 모두 패배합니다.” 트럼프가 설계한 ‘관세 올가미’에 결박된 채, 우리는 끝내 세계가 함께 패배하는 길로 가고 있는 건 아닐까.





정강현([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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