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 시절의 어떤 기억은 평생을 가도 선명하다. 너덧 살 무렵 나는 골목길에서 혼자 놀고 있었다. 여자는 올린 머리에 동그란 금귀걸이를 하고 있었다. 작은 발, 실룩거리는 엉덩이, 여자가 잠깐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던 것 같다. 뒤뚱거리며 여자는 햇빛 속으로 사라졌다.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골목길의 전족은 기묘했지만 아름다웠다.
얼마 전 한 언론사의 기자로부터 여성의 발이 가진 사회적 의미를 묻는 전화가 왔다. 요즘 떠들썩한 전 대통령 부인의 명품 구두에 관한 특검 기사를 쓸 요량이었던 것 같다. 나는 그보다 ‘오란의 발’을 먼저 떠올렸다. 펄 벅의 『대지』에서 가난한 농부 왕릉은 부잣집 하녀인 오란을 아내로 맞았다. 그는 첫날 밤 전족을 하지 않은 여자의 크고 넓적한 발을 보고 실망한다. 훗날 아내의 덕으로 부자가 된 왕릉이 들인 첩은 전족의 여자들이었다. 여자에게서 무용한 아름다움을 찾는 남자를 보고 여고 시절의 나는 본능적으로 내 발을 살짝 움츠렸다. 엄마를 닮아 나의 발은 크고 넙데데했다.
신발을 벗은 전족의 발은 끔찍하다. 어린 여자아이의 발가락을 모두 꺾어 발바닥에 붙여서 천으로 칭칭 동여매었다. 기형이 된 발에 신발을 신기면 작고 앙증맞았다. 전족의 핵심은 발의 모양새가 아니라 크기였다. 명품 구두의 ‘신데렐라 수사’도 사이즈가 관건이다. 나는 전 대통령 부인의 발 크기를 모른다. 그러나 내 경험상 명품 구두를 신으면 어떤 못생긴 발도 아름답게 보였다.
이집트 신화 로도피스의 신발은 신데렐라 이야기의 원형으로 보기도 한다. 독수리가 아름다운 노예 로도피스의 신발 한 짝을 훔쳐 왕의 무릎 위에 떨어뜨렸다. 작고 예쁜 신발을 보고 흥분한 왕은 구두의 주인을 찾아내어 결혼한다. 두 이야기의 왕과 왕자는 여자의 발에 비정상적으로 집착했다. 당시의 미적 기준을 떠나서 신발을 보고 여자를 상상하는 자체가 희극적으로 느껴졌다. 혹독한 노동에 시달리는 하류층인 그녀들의 맨발이 뭐 얼마나 아름다웠겠는가?
나는 월급날이면 친구들을 만나 당시 유행의 첨단이던 명동에서 구두를 샀다. 젊은 날 하이힐을 신었던 우리는 발가락이 변형되는 무지외반증에 연골연화증의 부작용을 앓았다. 불편하다는 걸 알면서도 구두를 신으면 신분이 상승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 내가 산 것은 ‘타인이 보는 나의 발’이었다. 나는 전족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우리의 무의식 속에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여자의 발이 아름답게 보이는 착시 효과의 명품 구두를 예로 들었다.
우리나라 한복의 버선도 나는 불편했다. 문학 작품에 등장하는 그놈의 오이씨는 한동안 나를 분노하게 했다.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버선”은 내겐 언감생심이었다. 작고 예쁘고 맵시 있는 오이씨 발은 노동할 수 있는 ‘오란의 발’이 아니었다. 그러나 “보기에 좋았더라”라는 주옥같은 말씀은 나의 생물학적 한계를 벗어나서 내 청춘의 골을 때렸다.
얼마 전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현관에서 외출하는 딸의 인사를 받았다. 화려한 원피스에 운동화를 신은 차림이 눈길을 끌었다. 출근할 때도 저 모양이라고 친구가 투덜거렸다. “패션의 완성은 신발인데 요즘 애들은 옷과 신발이 따로 논다니까?” 젊은 층들 덕분에 운동화를 신은 나는 현재가 과거를 움직인다고 농담을 던졌다. 해외 관광객이 쓴 한국 방문기에도 자주 운동화가 거론된다. “한국 여자들은 드레스에도 운동화를 신는다!”
현종의 손바닥 위에서 작은 발로 춤을 추었다는 양귀비의 이야기는 기괴하게 들린다. 중국의 전족은 근대사회로 들어오면서 지식인에게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대문호 루쉰은 중매결혼으로 만난 본처 주안의 전족을 경멸했다. 주안은 유서 깊은 가풍에서 자란 참한 규수였다. 그녀의 죄는 전통과 관습에 충실한 어른들의 말을 거역하지 않은 것이었다. 루쉰은 ‘어머니의 선물’인 본처와 이혼도 하지 않고 신여성 쉬광핑과 평생을 해로했다. 왕릉은 전족한 여인을, 루쉰은 전족하지 않은 여인을 첩으로 들였다.
나는 가끔 내 유년 시절의 전족 여인이 나타나는 꿈을 꾼다. 그녀는 꿈속에서 오란이었다가 주안이었다가 서서히 햇빛 속으로 사라졌다. 신발은 신고 벗기 편해야 한다. 내 인생도 그랬으면 좋겠다.